'82년생 김지영' 맞은편에 선 '한국, 남자'... 최태섭 지음
"어쩌면 그렇게 한(국)남(자)스럽니?"
이 문장은 인터넷 서점 '예스24'가 지난 3일 회원들에게 발송한 e메일의 제목이었다. 해당 메일은 <한국, 남자>를 쓴 최태섭 작가와의 인터뷰를 안내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메일 제목 중 '한국남자'를 줄인 '한남'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했다며 남성 사용자가 많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예스24에서 탈퇴하겠다'는 글이 이어졌다. 한국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욕감을 받았다면서 불매운동을 하겠다는 주장도 나왔고, 결국 해당 인터넷 서점이 사과문을 게재하는 걸로 사태는 일단락됐다.
사실 홍보 메일의 제목으로 논란이 됐지만, <한국 남자>는 '불순한 발상'을 담은 책은 아니다. 한국 남성을 그저 비하하거나 조롱하기 위해 쓰인 책이라기보다, 사회-문화-역사적 맥락에서 한국 남성을 돌아보고 젠더 문제의 양상을 짚는 책에 가깝다.
2018년 오늘날 '한국 남자'를 줄여 부르는 '한남'에 왜 조롱의 뜻이 담기게 됐는지 <한국, 남자>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자.
'한국 남자'라는 곤란한 존재들
<한국, 남자>의 저자 최태섭은 한국 남자에 관해 "곤란한 존재"라 표현하며 "그 곤란함은 이중적"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의 남성들은 여러 시대를 거치는 동안 사회적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지 못했고, 그 실패를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탓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 남자에 관해 "사회적으로는 폭력과 억압의 주체이고, 내적으로는 실패와 좌절에 파묻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주장에는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군사 독재 시절 사회에 거론된 '남성성'이 토대가 된다. X세대와 IMF 시절 남성을 중심으로 학습된 좌절감도 언급된다. 이에 관해 책에서는 최근 정리된 문헌과 통계를 자료로 제시한다.
"1950년대에 국민국가를 위한 남성성을 주조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대중 그리고 남자들은 국가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중략) 불안한 국가와 마찬가지로 전쟁, 가난, 징집의 공포에 시달렸던 남자들의 남성성 역시 불안한 것이었다.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1950년대의 한국 사회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여성 혐오다." - 본문 114쪽 중에서
책에 따르면,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 때문에 여성은 가정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남성에게 귀속되지 않으면 손가락질받는 식으로 여성 혐오가 사회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강력한 가부장제-권위주의-반공주의에 기반하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을 거치며 많은 남성들도 희생당했다고 한다.
특히 노동자와 군인에 대한 처우가 열악했는데, 당시 정부가 이를 개선하기보다 남성성 강조로 회유했다는 식이다. 해방-전쟁 후 빈곤하게 출발한 한국이 근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 참고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로 남성에겐 가정 부양의 의무를, 여성에겐 가부장을 따를 것을 주입했다는 주장이다.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선언한 이승만은 호주제로 대표되는 가부장제 질서를 구축해, 남자들에게 사회적 권위를 부여하고 여성을 이등 시민화했다. 그리고 이 가부장적 질서는 징병제를 시행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데, 군 복무는 사회적으로 권리가 주어지는 일등 시민의 조건이었으며, 동시에 '후방'에 있는 여성을 보호하는 자로서 '여성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주요한 정당성의 근원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는 이후 한국 사회의 젠더 구도의 원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 본문 106쪽 중에서
'나도 피해자다' 남성들의 자기 연민과 분노
책에서는 IMF 시대를 거치면서 '연민'으로 변해 살아남은 가부장제와 남성성의 상황을 짚는다.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로 온 가족이 가족 부양 의무를 진 아버지를 위로하던 게 대표적인 예다. 경제 위기 이후에도 가부장제는 해체된 게 아니라 유지됐고, 부양 의무를 진 아버지를 우러러보다가 측은하게 보는 식으로 구성원의 시선만 변했을 뿐이다.
< 한국, 남자>는 인터넷 시대가 열린 후 '메갈리아' 사이트의 탄생 배경과 최근 게임계 내 검열 사태까지도 다룬다. 뿐만 아니라 2018년이 되기까지 온라인 문화에서 '놀이'가 되어버린 여성 혐오도 지적한다.
또한 책에서는 정치-사회적 사안을 두고 일베와 일베가 아닌 인터넷 커뮤니티가 대립하다가도 '권리만 챙기는 김치녀'에 대한 비난에는 하나가 되는 모습을 거론한다. 특히 20만 명 이상의 동원을 기록한 '여성 징병 요구 청원'은 이런 사고방식의 핵심을 건드린다.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최근 스스로의 '피해자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2017년 청와대에서 만든 정책 청원 사이트에는 20만이 넘는 인원이 여성 징병을 요구하는 청원을 한 바 있다. (중략) 사실 이 청원의 핵심은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인터넷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남자만 군대 가는 것이 억울하다'라는 정서다. 이외에도 인터넷에는 "권리만 누리려 하고 의무는 다하지 않으려는 한국 여성"이라는 편견 가득한 이념형이 사실관계와는 상관없이 널리 퍼져 있다." - 본문 51쪽 중에서
저자는 사례와 자료를 정리해 여성 혐오, 혹은 여성을 비난하려는 남성의 심리가 '군 복무 트라우마'와 '무너진 가부장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회적으로 취업이 어려워지자 "청년 남성들이 세대론을 면죄부 삼아 자기 연민에 빠져들었다"라고 비판한다.
자신에게 고분하게 굴며 내조와 살림 등을 맡을 '개념녀'의 환상을 좇고, 이 환상이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여성과 경쟁하게 될 때 박탈감과 분노에 휩싸이게 됐다는 해석이다. 결국 종합하면 '한국 남자'라는 말을 줄여 '한남'이라 부르는 게 조롱의 의미가 된 건, 이와 같은 사회적-문화적 맥락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82년생 김지영>의 맞은편에 선 <한국, 남자>
< 한국, 남자>에는 통계와 관련 저서의 내용을 인용한 부분도 많지만, 전체적으로 어렵지 않게 술술 읽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100만 부의 판매를 기록한 <82년생 김지영>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에 없던 얘기가 아니라 이미 알려진 사실을 정리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책 모두 젠더 문제를 통해 오늘날 사회의 현실을 담았다는 점도 닮았다.
말하자면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여성 혐오와 차별을 겪는 한국 여자의 맞은편에 최태섭이 정리한 '한국 남자'가 서 있는 셈이다. 한국 사회의 일부 남성은 '남자도 피해자'라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그래서는 달라질 게 없다'고 지적한다.
여성 혐오와 차별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을 향해 '나도 힘들다'라고 토로하는 건, 기존의 남성 중심적 질서를 붙드는 결과만 낳을 뿐 결과적으로 상황을 더 나아지게 만들지 못한다는 얘기다.
책에서는 2018년의 젠더 이슈를 두고 "지금의 상황은 균열을 부정하기 위해 더 조직적이고 가열찬 여성 혐오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누군가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한 사람의 주체로, 또 타인과 연대하고 돌보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만약 '한국 남자'가 멸칭이 된 현실이 싫거나 여성 혐오에 관한 진부한 논쟁이 어서 끝나길 바란다면, 앞서 언급된 질문의 답을 먼저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물론 젠더 이슈를 두고 여성들에게 화풀이만 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하고, 한국 남자의 뒤틀린 욕망을 이해하는 일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2017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미투 운동으로 젠더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오늘날, 분노를 쏟아내는 것보다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한 책 <한국, 남자>를 읽어보길 권한다. '여성 혐오' 논쟁이 나올 때마다 갈라지는 한국 사회를 '제대로' 봉합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덧붙이는 글 | <한국 남자>(최태섭 씀/ 은행나무 펴냄/ 2018.10. 29/ 1만5000원)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발행됐습니다. http://omn.kr/1etw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