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홍성수 교수 외 18인이 쓴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2019년 11월, 안상수 자유한국당 의원 등 44인에 의해 국가인권위원회법 일부개정안이 발의됐다. 국가인권위법의 평등권 침해 차별 사유 중 '성적지향'을 삭제해야 한다는 취지에 '혐오조장법'이라는 비판도 제기됐고, 국가인권위가 직접 반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 인권위 "차별금지 대상서 '성적지향' 삭제, 민주주의 역행" http://omn.kr/1lnxx) 21세기 한국 정치권에서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나온 셈이다.
또한 2019년 한 해 동안 전국 각지의 여러 인권조례, 학생조례, 문화다양성조례 등은 성소수자 인권 보호나 성평등의 가치를 담았다는 이유로 보수-종교단체의 반발에 시달려야 했다. 12월 20일 <뉴스앤조이>가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2019년 전국 243개 지방자치단체에서 보수개신교 단체의 반대로 무산된 조례는 118건(발의 조례 중 약 절반)에 이른다고 한다.
해마다 성소수자의 존재를 알리고 인권 보호를 외치는 퀴어문화축제가 전국에서 열리고 있지만, 반발과 성소수자 혐오의 움직임도 거세지는 분위기다.
지난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가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다'라고 학문적 발표를 공표했고, 미국과 유럽 등 여러 국가에선 동성결혼 법제화가 정착됐거나 진행되는 중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선 세계적 흐름과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는 걸까?
2019년 12월 출간된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는 앞서 언급한 한국의 시대 상황을 담고, 성소수자에 대한 쟁점들을 연구자들의 기록으로 엮은 책이다.
'이분법적이지 않은 성별', 그리고 성소수자 차별 사례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에는 박한희 변호사, 김승섭 고려대 교수,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 자캐오 사제 등 총 19명의 다양한 인물들이 저자로 참여했다. 이들은 성별이분법으로 가를 수 없는 성별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 다양한 성적 지향을 소개하며 이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문제점도 짚는다. 이들은 법, 보건, 종교, 문화 등 각자의 분야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오해를 풀어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책에서 차별의 사례로 가장 먼저 거론되는 건 '남녀' 외 선택지를 제공하지 않는 한국의 출생신고서, 화장실 등이다. 출생을 신고하는 과정부터 관공서 업무를 볼 때마다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화장실에 갈 때 정체성을 이유로 출입을 거부당하고, 결국 소변 등을 참다가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는 본문 속 트랜스젠더의 일화는 성소수자가 겪는 고초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해외의 사례는 어떨까? 일본과 유럽 등에서는 이미 성별 표기란을 없애거나 본인이 직접 성별을 적는 방식의 행정 서류 양식이 보편화되는 중이라고 한다. 개별 칸으로 나뉜 공중화장실 또한 성별, 장애, 자녀 유무에 구애되지 않고 누구든 사용할 수 있도록 변화하고 있다는 내용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성소수자들을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에서 저자들은 과거 성소수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지금까지 차별을 유발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 이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는 걸 알려준다. 그러면서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한국에서도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국가에서 과거에 동성애가 질병으로 인식됐으나 지난 60여 년 동안 동성애에 대한 수백 편의 연구에서는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고 밝혀진 바 있다고 저자들은 덧붙인다.
다음은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가 표명한 공식입장 중 일부분인데, 성소수자를 차별해온 것에 대한 역사를 멈춰야 한다고 선언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동성애가 그 자체로서 판단력, 안정성, 신뢰성, 또는 직업능력에 결함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미국정신의학회는 고용, 주택, 공공장소, 자격증 등에서 동성애자에 대해 행해지는 모든 공적 및 사적 차별을 개탄하며, 그러한 판단력, 능력, 신뢰성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동성애자에게 더 많이 지워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 본문 37~38쪽 중에서
정체성을 문제 삼는 혐오발언, 이제 멈춰야 할 이유
국내에서 진행된 연구 중, 성소수자의 정체성이 일터에서 괴롭힘으로 이어진다는 걸 보여준 사례도 있다. 지난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성적지향·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장에서 본인의 정체성으로 인한 따돌림, 협박, 조롱, 신체적 폭력, 성희롱, 성폭력 중 하나 이상을 경험한 이의 비중은 전체 516명 중 41.7%(215명)에 달했다. (관련 기사 : "게이처럼 굴지 마라? 성소수자 향한 폭력" http://omn.kr/r89p )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에서는 애플 CEO나 할리우드의 많은 배우들이 성소수자로서 커밍아웃하고 활동한다는 걸 거론하면서, 차별이 없는 환경에서 더 많은 이가 능력을 마음껏 드러내고 활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이키, 마이크로소프트, 월트디즈니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을 채택하고 있다면서, 차별 없는 직장이 더 큰 성과를 내기도 한다는 주장도 담았다.
또한 책에서는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나 가짜뉴스의 배경도 짚는다. 흔히 '에이즈의 주범'으로 성소수자의 성향이 거론되는데, 김승섭 고려대 보건학과 교수는 "동성애끼리 성관계를 갖는다고 HIV가 발생하지 않"으며,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콘돔 착용 등 위생의 문제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오히려 게이 등 일부 성소수자에 낙인을 찍는 행동은 에이즈 예방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신규 감염을 막으려면 주기적인 검진이 필요한데, 질병에 대한 낙인으로 인해 잠재적인 환자들이 음지에 숨으면 더 위험하다는 얘기다.
"혐오는 쉽다. 가장 약하고 아픈 사람을 욕하면 되니까. 어떤 이들은 HIV 감염인에게 '네가 잘못해서 걸린 거다. 네 치료에 들어가는 세금이 아깝다'고 함부로 손가락질한다. 이러한 혐오는 인권과 사회보장의 관점에서 그릇된 태도일 뿐 아니라 상황을 더 악화한다. 혐오와 낙인은 한국의 HIV 신규 감염을 부추기고 더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한국사회의 HIV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첫걸음은 혐오와 사회적 낙인을 거두고 그 바이러스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다." - 본문 53쪽 중에서
'정상성'의 울타리가 허물어지는 시대
한국의 일부 종교단체는 성경을 근거로 동성애 혐오발언을 쏟아내기도 한다.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중에서는 과거의 기록을 토대로, 성경이 근거라며 미국의 흑인 노예제를 옹호(1888년 '권리에 대한 반성경적 이론들')하거나 성평등을 폄하한 종교계의 발언을 보여주기도 한다. 만약 종교인들이 이런 과거를 부끄럽게 생각하며 반성한다면, 대상만 바꿔 성소수자를 향해 비난을 일삼는 것도 멈춰야 하지 않을까.
시대가 변하면서 특정 집단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바뀌곤 한다. 흑인, 여성, 장애인을 차별해온 역사는 '비장애인 백인 남성'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잘못 생각한 발상을 보여준다. 책의 본문에서도 '정상성'이라는 것이 변하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성취가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책의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의학적으로, 법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개인의 성향이 단지 사회에서 소수라는 이유로 일부 기본권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할까? 2020년을 앞둔 한국 사회가 이 물음에 '아니다'라고 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는 헌법과 국제인권법의 정신에 따라, 누구도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평등한 세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으며,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법제도적인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또 종교의 이름으로 이웃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마음을 열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 본문 314쪽, '2016년 6월 11일 한국성소수자연구회(준) 명의로 연구자 353명의 서명을 받아 발표한 선언문 중 일부분
지난 2017년 열린 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후보 간에 '동성애를 반대하느냐'는 물음과 대답이 나왔고, '동성애는 찬성하고 반대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본문에 따르면, 놀랍게도 20년 앞선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동성애를 두고 찬반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이 나왔고 후보들 사이에서 '인정한다'거나 '공감한다'는 수준의 대답이 나왔다고 한다.
앞으로 열릴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성소수자에 관련해 더 진보되고 개인의 정체성을 보호하는 차원의 질문과 정책 공약을 들을 수 있을까? 더 진전된 논의를 위해 정치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관련 지식을 총망라한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를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 기사로도 발행됐습니다. http://omn.kr/1m5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