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정지민 작가의 책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지난 2018년 6월 <씨네 21>에 기고한 글 '혁명과 부역'을 통해, 과거에 "페미니스트로서 결혼은 가부장제에 부역하는 행위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지를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권김현영은 글의 마지막에서 "페미니즘이 정말 혁명적으로 관철되어 지금까지의 성과 사랑, 가족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 완전히 변화된다고 해도 부역자 색출이라는 방식은 일상의 혁명인 페미니즘의 지향과 방법과는 거리가 멀다"라며 "나와 같지 않으면 모두 틀렸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공권력으로 만들고자 하는 태도"라고 설명했다. 기혼자라고 해서 페미니즘 이슈에서 부역자 신세가 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부역' 같이 진영 논리가 담긴 표현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다만 누군가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결혼을 한 이후에도 개인이 온전히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수 있을까? 혹은 가부장제 전통을 어느 정도는 따라야 할 수도 있으니, 결혼하면 성평등은 기대하지 말고 타협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이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긴 책이 있다. 바로 정지민 작가의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이다.
'결혼한 페미니스트도 행복할 수 있을까'
2019년 9월 출간된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는 정지민 작가가 결혼 후 자신이 겪은 일화들, 그리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적은 책이다. 정지민 작가는 <대학내일> <주간경향>에 연애 칼럼을 쓴 바 있다.
저자는 결혼 제도와 이성애, 폭력의 역사와 성별에 따른 차이, 불륜 등에 대한 생각을 담백한 글로 적었다. 2016년 전후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가 된 후 느낀 것들과 결혼 생활을 겪으며 고민한 지점들이 책에 실렸다. 결혼한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쓴 책인데, 결혼의 장점 혹은 단점을 단순히 나열하는 방식으로 적은 내용이라기보다는 '페미니즘과 결혼이 함께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수차례 던지며 지낸 수기에 가깝다.
"새 시대의 부부들은 '길 없는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가정에서 페미니즘을 달성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중략)
여성이 참정권을 얻은 것이 20세기 초중반의 일이다. 대학에 가기 시작한 건 30~40년밖에 되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지금의 우리를 키운 건 가부장제 하의 불평등한 가정이다. 그러니까 부부가 함께 '페미니즘적 가정'을 만드는 건 장님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본 적 없는 코끼리를 그리려는 것과 비슷하다." - 본문 54쪽 중에서
총 192쪽 분량의 글에서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여러 사안을 깊이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관계의 주도권이나 함께 살기에 대한 서술에서는 문장마다 섬세한 표현과 함께 사안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지점들이 담겼다. 여성 2인이 룸메이트로 지낸 얘기가 담긴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언급하며, 동거 혹은 관계 맺기가 반드시 이성애 부부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면서 '생활동반자법'을 거론하기도 한다.
"영화 <올드보이>의 반전이 밝혀지는 중요한 장면, 왜 자신이 15년 동안 감금되어야 했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한 오대수에게 이우진이 말한다. "자꾸 틀린 질문만 하니까 맞는 대답이 나올 리가 없잖아. 왜 이우진은 오대수를 가뒀을까, 가 아니라 왜 풀어줬을까, 란 말이야." 비혼에 대해서도 그렇다. 도래한 비혼 시대를 맞아 우리도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왜 결혼 안 해, 에서 왜 결혼해, 로." - 본문 131쪽 중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
책에 따르면, 정지민 작가는 결혼한 뒤 제주도로 이주했다. 이후 여성인 본인이 직장 생활을 하고, 남편은 프리랜서로 집에서 일하며 가사 노동을 했다고 한다.
내용 중에는 기존의 '남녀 성역할'이 뒤집힌 관계에서 그가 깨달은 지점도 있다. 저자는 강남역 살인사건, '버닝썬 게이트' 등을 보며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되어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직장 생활하는 자신이 집에서 일하는 남편과 갈등을 겪을 때마다 전형적인 '한국 남자'의 태도를 취했단 걸 깨달았다고도 전한다. 집에 있는 남편에게 뒤늦게 야근을 통보한다거나, 늦게 퇴근해서 '밥상을 차려달라'라고 말한 경험도 덧붙이면서.
"남편과 몇 번의 갈등을 겪으며, 나는 '한남'과 페미니스트를 가르는 것은 생물학적 성별이 아니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새삼 체감했다. 의식적으로 경계하지 않는다면 강자의 위치에 선 누구나 '한남'이 될 수 있는 거였다.
거꾸로 말하면 날 때부터 페미니스트는 있을 수 없다. 페미니스트는 후천적이고 의식적인 지향이자, 자신을 돌아보는 매일매일의 실천이다." - 본문 13쪽 중에서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의 내용을 보면, 결혼과 페미니즘은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저자는 책에서 "결혼한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의 문제를 지적하는 한편, 사회의 일반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새로운 부부 관계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퍼져 나가게 하는 거라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남성 중심의 사회와 '정상성'에 균열을 내는 게 페미니즘이라면, 더 다양한 개인의 목소리 또는 관계를 성평등 이슈를 통해 이야기해 나간다면 어떨까.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향의 논의가 이어진다면, 더 많은 이들이 서로를 젠더 규범의 억압에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 글은 <오마이뉴스> 기사로도 발행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