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우리는 자격 없는 여성들과 세상을 바꾼다'
2020년 한국에서는 두 명의 트랜스젠더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한 명은 성전환 수술 후 군 복무를 이어가고자 희망했으나 강제전역 처분을 받은 변희수 하사이고, 다른 한 명은 숙명여대에 합격한 후 성적 정체성을 밝혔다가 쏟아진 혐오발언에 결국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젠더 여성 A씨다.
2020년 5월 출간된 <우리는 자격 없는 여성들과 세상을 바꾼다>는 A씨가 숙명여대 합격하고 입학을 포기한 시기까지 여러 단체와 개인이 발표한 성명을 묶은 책이다. 책의 인세는 트랜스젠더 인권운동에 사용된다고 한다.
트랜스젠더 여성 A를 향한 환대와 지지의 기록
책의 도입부에는 여성학자 권김현영의 글이 실렸다. 그는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 A씨가 22살에, 다른 새내기보다 늦은 입학을 하게 된 배경으로 한국의 까다로운 성별정정 절차를 짚는다. 한국에서는 몇 년 동안 성별 불일치감으로 고통받은 이가 정신과 치료와 호르몬 치료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증명하고, 마침내 성전환 수술까지 거쳐야 성별정정이 가능하다.
합격 당시 A씨는 아직 학교에 다니지도 교내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성소수자라고 밝히자 '여대에서 폭력을 행사할지도 모르는 존재'라는 논리의 말을 들어야 했다. 정체성만을 근거로 '언젠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차별적 발상과 혐오발언이 쏟아진 것이다. 권김현영은 이런 상황을 언급하며 '무지의 공포'를 이겨내자고 말한다.
"숙명여대 법학부에 재학 중이라는 한 학생은 개인 성명을 내어, 자신 역시 낯설고 두렵기도 하지만 '합류'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많은 성명서가 반복해서 말하는 메시지는 우리는 결코 무지 속에서 안전하다는 감각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함께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일지도 모른다. 무지의 공포를 무지에의 공포로 이겨 내자. 인간에게 남은 희망이 있다면 그것뿐이다." - 본문 14쪽 중에서
변희수 하사가 군에서 강제전역될 당시 많은 기사의 댓글에서는 "성전환자가 군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는 말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편견과 달리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선 이미 트랜스젠더가 비트랜스젠더와 다를 바 없이 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대학에서 여성을 향해 폭력을 저지를 것이란 우려도 있지만, 사회의 시선에 가려졌을 뿐 한국에도 이미 대학에 다니는 트랜스젠더가 존재한다. (관련 기사 : 트랜스젠더 대학생 "A씨처럼 나도 당했다, 꼭 살아남길 http://omn.kr/1mi08 )
피부색이나 나이, 성별, 국적, 성적 지향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반드시 험악한 인간일리가 없듯이, 성별 정체성이 다르더라도 사실 나와 크게 동떨어진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 군대든 대학이든 단지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배제하고 내보내기 전에, 구성원 간 안전을 확보하고자 내부 규정을 보완하며 함께 지낼 방식을 먼저 고려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앞서 인용한 글처럼, 사실 우리가 소수자에 두려움을 갖는 이유 중 상당수는 '무지' 때문일 수 있다는 걸 돌아보면 배제는 더욱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진정한 여성'임을 증명하라는 말의 역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물학적 여성과 남성은 사회가 임시로 정한 기준일 뿐이다. 또한 "생물학적 성별인 지정성별은 여성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오히려 이분법적인 성기 환원주의를 공고히 한다.
트랜스 여성은 당신에게 '여성성'을 증명할 의무가 없다. 젠더는 타인이 찬성이나 반대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존재하는 정체성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미 2018년에 트랜스젠더를 정신 질환 목록에서 제외하며 이를 인정하였다. 트랜스젠더는 '허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시스젠더의 권력이며 혐오하는 이의 사고방식이다." - 본문 19~20쪽 중에서
위 글은 숙명여대 성소수자인권모임 '무럭무럭'에서 발표한 성명 중 일부다. 무럭무럭은 당시 논란에 대해 "타인의 정체성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다"며 "당신이 이 사안에 대한 찬반을 논하는 것이 차별과 혐오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하긴, 돌아보면 우리는 이성애자인 사람들의 대학 입학에 대해선 애초에 성별 정체성을 잣대로 찬반을 묻지 않는다. 성소수자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고, 기존에 알던 판단 기준에 어긋난다고 해서 특정 집단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것도 차별일 것이다.
본문에 실린 성폭력상담소의 성명은 누군가에게 '진정한 여성'임을 증명하라는 요구가 성별 이분법을 강화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공고히 한다고 지적한다. 이어 '자격 없는 여성'을 배제하는 게 쉬운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혐오와 차별이 아니라 공감-연결 등을 통해 대응해야 한다고 적었다.
"우리는 이질적인, '자격 없는' 존재들과 함께 싸우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왔다. 이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왜 그때 싫다고 하지 않았는가? 왜 술집과 모텔에 따라갔는가?"라고 질문하며 피해자의 행동이 모순적이라고 비난할 때, 우리는 피해자와 함께 투쟁했다. (중략) 존재에 대한 비난을 사회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 본문 28~29쪽 중에서
더 많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사회
본문 중 캠퍼스페미네트워크는 성명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성의 범위만 확정될 뿐 그 외의 존재들은 밀려나고 지워진다"라며 "이러한 악순환을 깨뜨리고 성별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궁극적 지향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 성명에서는 "성기 모양이나 염색체로 개인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것은 폭력적"이며 "우리의 목표는 정상성의 탈환이 아니라 정상성의 파괴"라는 내용도 찾아볼 수 있다.
이성애자 시스젠더 남성을 정상이자 표준으로 여기는 사회의 기준에 여성을 애써 포함시키려 할 게 아니라, 소수자를 '비정상'으로 몰아가는 야만적인 개념을 거부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얘기다. 남성-여성 또는 시스젠더-트랜스젠더 같은 이분법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정체성을 서술한 부분도 눈여겨볼 만하다.
"정체성이란 단순히 자신에게 주어진 특질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은 개인에게 강제되는 사회적 틀에 그 사람이 도전하면서 써 내려가는 서사적 의미를 갖는다.
정체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서사의 내용이 정당한지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서사의 편집권이 오롯이 그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 본문 122쪽 중에서
남성이 중심인 줄 알던 사회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갖지 못하거나 유리천장에 부딪히고, 백인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흑인과 유색인종이 부당한 폭력을 겪는 게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이제 많은 이가 안다. 이를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졌다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시험을 보고 정당한 과정을 거쳐 대학에 입학하는 데 트랜스젠더만 비난을 듣는 상황의 문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인권을 한정된 자원이나 '제로섬게임'으로 오해하지만,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더 많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사회가 모두에게 훨씬 나은 곳이라는 사실은 흑인과 여성 등의 인권이 개선되어온 지난 역사가 증명한다. 그러니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정상성 여부나 자격을 묻고 소수자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자격 없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나가는 방향일 것이다. 이 책의 묵직한 제목이 담아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