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가 살고있는 97년 구축 복도식 아파트. 벽적골8단지주공아파트는 리모델링을 놓고 자산증식을 하고싶은 세력과 그냥 살던대로 살고싶은 세력 사이에 찬반논쟁이 뜨겁다. 흡사 작은 정치판 같다. 나는 전세입자라서 내가 사는동안 아무 문제만 없다면 나에게는 관심없는 이슈다.
아파트가 노후화되면서 엘리베이터도 90년대에 머물러있다.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의 엘리베이터다. 최근 엘리베이터 고장이 잦아지면서 엘리베이터 교체 안내가 공지되어있다. 공사기간은 한달이다. '그럼 한달동안 계단으로 다녀야되?'싶었지만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두대라서 한대씩 교체된다고 한다.
어차피 우리집은 5층이라서 엘리베이터 이용 안해도 계단으로도 금방 오르내릴 수 있다. 저층세대의 장점. 그렇게 아무 문제없이 지나가는듯 했으나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집에서 안쓰고 방치되어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던 중 잘못 구매한 흑백프린터토너를 중고로 팔기위해 당근거래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평일 저녁 퇴근 후 약속을 잡고 집에서 기다렸다.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아내에게 "당근하고 올게~"라며 인사를 하고 문밖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1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린다. 5층.. 4층.. 3층.. 2.5층 덜컥. 멈춰버렸다. 2층과 3층 사이에 멈춰쉈고 엘리베이터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반지하마냥 2층과 3층 사이에 걸터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경비실 통화버튼을 누르고 상황 설명을 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노후화되서 그런지 통화가 원활하지않다. 소리가 아주 작게 들리고 나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전달이 안되는 느낌이다. 불행중 다행인건 옛날 엘리베이터라 그런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데이터가 잘 터졌다.
그래서 당근거래 하러 오신분께도 정중하게 문자드렸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멈췄네요..잠시만요ㅜㅜ"라고. 방금 전에 "지금 내려갈게요~"라는 문자 뒤에 이어진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문자 그분도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자기 나 엘리베이터에 갇혔어." 당황한 아내는 곧장 집에서 나와 경비실에 제 남편이 지금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다고 SOS를 요청했다. 경비아저씨는 아주 느긋하게 "안에 사람이 있다고요? 아무 소리 안들리는데.. 아는 사람이에요?"라며 도움 1도 안되는 소리들을 내뱉었다. 아내는 "남편이라니깐요! 지금 통화중이에요" 답답함을 호소했다.
흔히 있는 일인듯 경비원의 태도와 아내의 태도가 정말 상반됬다. 그걸 아내와 통화중이어서 나는 갇힌 엘리베이터 안에서 듣고 있었는데 참 아이러니했다. 그 안에서 나는 사실 뭐 호들갑 떤다고 내가 이 엘리베이터를 움직일 수 있는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건 밖에 아내를 믿고 침착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면서 상상을 해보게 됬다. 시나리오는 두가지. 밖의 도움으로 내가 무사히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가는 것과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 것.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봤을 때 부상으로 끝날지 죽음으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뭔가 초연해졌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정말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구나. 당근거래하러 내려갔다 온다던 남편이 엘리베이터에 갇혀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좀 오바스러울 수 있지만 동기부여 영상에서 접했던 메멘토모리를 떠올렸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밖에서 엘리베이터를 열어주셔서 나는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당근거래를 하며 아내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이 날의 기억은 평범한 일상속에서 갑작스레 죽음을 상상해 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