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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자리를 대신한 여섯 살 아이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 것을!

by 반짝이는 루작가

3월만 지나면 한가해질 거라고 했다. 그렇게 남편의 일주일 해외 연수를 아들 둘과 사투하며 기다렸고, 출장 때문에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야근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그 시간 또한 인내하며 기다렸다.


4월? 달력을 보니 모임과 회의 등 늦게 퇴근한 날이 주 1-2회가 되는 건 기본값이 되어버렸다. 5월은 좀 나아질 거라 기대했다. 가족 행사가 많이 있던 5월, 우리의 결혼기념일, 어버이날을 제외하곤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 많았다.


결혼 전, 나는 남편이 가정이 먼저인 사람일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나도 그를 기다리는 데 신물이 난다.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그날을 전후로 하여 주일미사를 드리고 성전 앞에서 사진을 찍었었다. 스케치북에 하느님께 감사 인사를 써서 드리고, 성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각오를 다지면서.


그러나 올해는 집에 있는 카메라도 사무실에서 챙겨 오지 못해 다음 주로 미루고, 그날이 어제였는데 스케치북에 어떤 메시지를 적을 것이며 어떻게 꾸밀지 모든 걸 내가 생각해내야 했다. ‘나 혼자만의 결혼이었나? 나만 사진 찍기를 원하는 건가?’


이것도 서럽고 짜증 나 죽겠는데 엄마 아빠를 모시고 미리 당겨 내 생일파티로 저녁을 먹으려던 때, 미리 예약했던 케이크도 내가 찾으러 가야 했다. 다음 주 행사 준비로 바쁜 걸 이해하려 하면서도 야근에 집에 와 새벽까지 작업하고 피곤에 찌든 남편을 볼 때면 너무 화가 났다.


일 중독자. ‘너는 회사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인정받으니까 좋지? 성취감이 있어 행복하지? 집에는 그냥 들어와 이불속에 쏙 들어가면 그만이고.’ 하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러움과 분노의 감정이 동시에 들었었다. 그러나 친한 언니로부터 부부는 경쟁구도가 되어선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 남편을 돕고 싶었다.


늦겠다고 매번 연락이 올 때마다 욱하는 마음을 꾹 누르며 괜찮다고 답장을 보냈고, 야근이 반복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욱해버린 날은 또다시 문자를 보내며 여보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고 아이들이 말을 안 듣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거짓말까지 하며 참았다.


어제 아침, 분명 전 날도 늦게 잠이 든 것 같아 제일 마지막까지 깨우지 않고 혼자 애들을 돌봤다. 일어나 내가 남편의 컨디션을 물으며 오늘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지 물었고 남편은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놓고선 10분만 시간을 줄 수 있는지, 자꾸 뭔가에 정신 빠진 사람처럼 나와 아이들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결혼기념일 스케치북도 아이들, 특히 첫째가 색칠도 다 해주고 생일 케이크도 첫째가 나와 함께 찾으러 가주었다.


날씨는 왜 하필 이렇게나 좋은지. 오전에 책 축제를 가기로 해놓고선 안절부절못하는 남편의 모습에 그냥 일하다 오라고 말하고 혼자 애들과 축제장으로 갔다.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끓었지만 30분이면 된다니 시간에 맞게 나와 바통터치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도 오후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결국 남편은 애들을 데리고 가야 할 데가 있다며 다시 우리를 차에 태웠다. 결국 애들도 축제를 즐기지 못했고 나도 오후 일정에 늦고 말았다.


도대체 일이 여보한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당신이 이렇게 가정보다 일이 먼저인 사람인 줄 몰랐는데 너무 실망스럽다, 지금 나와 우리 아이들이 필요한 건 돈보다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이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거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미친 듯이 폭주 운전을 하는 남편을 보며 참아야겠다 생각했다. 그도 지금 폭발할 것 같았으니까.


결국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업체에 가서 볼일을 봤고, 낮잠시간이 다 꼬여 막 잠이든 아이와 함께 다시 어린이 미사 시간에 상봉하였다. 마음이 다 풀리진 않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성전에서 사진도 찍고, 부모님과 저녁도 먹고 집에 와 케이크에 촛불까지. 그렇게 가정의 달 가족 행사를 마쳤다.


남편에게 진짜 내 생일엔 꽃이고 케이크고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 일찍이나 들어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며 비꼬아 말했고, 차라리 그냥 당신이 아파버렸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나와버렸다. 그래야 지금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 건지 느낄 것 같다고, 혹시나 쓰러진다면 회사에서 쓰러지라고까지. 필터링이 안된 나의 가시 돋친 말들이 그의 가슴에 콕콕 박혔을 거다.


어제 같은 날은 아이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둘만 있었다면 서로에게 더 상처만 주었을 것 같다. 내일부터도 내내 야근일 텐데 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정의 달, 남편이 채우지 못하는 온도를 아이들이 올려주고 있다. 6월은 조금 더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해도 될까, 그냥 포기하는 게 나을까.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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