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우 교수님의 <단단한 영어공부>를 읽고
영어를 30년 가까이 배워왔다. 초등학생이 되면서 부모님이 윤선생 영어를 시켜주셨고, 3학년 때 처음으로 정규 수업 시간에 영어 과목이 생겼다. 담임 선생님은 내가 발음이 좋다며 아이들이 나의 발음을 따라 하도록 유도하셨다. 자신감 넘치게 영어를 만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영어 학습지에는 점점 문법의 비중이 늘어났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입시 영어가 시작되었다. 원어민과 대화하는 시간보다 단어와 문법 위주의 수업과 시험만 계속될 뿐이었다. 영어에 대한 흥미도 반반, 실력도 반반으로 떨어지며 영어와 이별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영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대학교에 입학해 영어영문학을 복수전공하고 교직 이수까지 했다. 국제학교에서 2년 동안 보조교사를 하며 영어 교육을 더 공부해보겠다고 대학원까지 졸업했으나 누군가가 영어를 물어보면 긴장되고 자신이 없었다. 이력서에 올라가 있는 나의 학력과 경력은 그저 운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진짜 영어 실력은 ‘Seal’이 물개인지 바다표범인지(실제로 물개, 바다표범 다 맞는 답) 헷갈려 몰래 영한사전을 찾아보는, 영어 앞에서는 얼어버리고 마는 전공생이었다.
결국 영어와 관련이 없는 일을 하다 출산하며 그만두었다. 5년 공백을 맞고 다시 해보고자 한 일은 초등학교 방과 후 강사였다. 그러나 경력이 부족해서인지 매번 탈락이었다. 자존감이 한없이 추락했고, 나는 무슨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내 발밑으로 시선을 옮기고 살펴보니 역시 나의 발자국들은 영어와 관련된 경험이 많았다. 그래서 다시, 더 이상 우리 갈라서지 말자며 영어를 내 품으로 끌어왔다.
어느 날이었다. 무조건 영어 문장을 외워보려고 유명한 교재의 Day 1, 2를 이어가고 있었다. 3일째가 되던 날 문득 이 공부가 맞나 하는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생활영어라지만 샤워하는 순서, 칫솔질하는 순서, 치실을 하는 방법까지 아주 구체적인 표현을 달달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는 누구를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는가, 언젠가 내가 외국인을 만날 때 이런 대화를 주고받게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때 이 책을 만났다. <단단한 영어공부: 내 삶을 위한 외국어 학습의 기본>.
교재 개발자가 전해준 언어는 ‘정확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내’ 것은 아닙니다. (p.110)
머리를 댕하며 울리는 문장이었다. 어쩌면 그 교재는 외국에서 살거나, 외국인 가족이 있을 때는 몰라도 지금 나의 삶에 필요한 영어는 아니었다. 매번 이리저리 휘둘리며 남들이 추천하는 교재나 영상을 따라가는 것은 ‘내’ 것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느 방향인지 잠시 멈춰 섰다. 다행히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위한 초록 신호등이 여기저기서 티링티링 켜지기 시작했다.
언어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입니다. ‘누림’이 학습의 중심이 된다면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지고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 중요한 것은 그 언어와 내가 엮이는 방식, 내가 그 언어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일, 그 언어가 나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p.33)
그동안 영어를 완벽하게 하려고 했기에 포기도 빨랐다. 시작은 단어집 한 권을 다 외워야지, 문법 강의를 매일매일 완주하겠다는 야심 찬 마음이었다. 그러나 하루라도 빠지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했고, 나와 별 상관없는 단어와 문장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재미가 없었다. 중간에 접어버린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주변에서 한국어의 뜻을 물어보면 모르겠다고 쉽게 사전을 찾아보면서, 영어는 어떤 단어든 대답할 수 있어야 실력 있는 강사라고 생각했다. 빈틈없이 나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점점 영어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하지만 돈을 버는 수단으로 놓을 수 없었기에 현재 내 삶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돌덩어리가 되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정확성이 발달하려면 부정확을 용인하고, 부정확하게 느껴지더라도 용기 있게 말하고, 나아가 부족한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p.124)
영어를 통해 내가 더욱 나다워진다는 것은 영어가 열어 주는 새로운 가능성을 통해 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말’을 ‘나의 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영어가 자라고 내가 성장합니다. (p.111)
이제는 부족한 나를 사랑하며 영어를 정복하려 하기보다 평생 친구로 만나려 한다. 어떠한 우정을 맺을까 생각하다 영어 그림책을 읽고 와닿은 단어나 문장을 내 삶과 연결하여 글을 쓰기로 했다. 책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중심에 ‘영어’를 놓아둔 것이다.
실천으로 옮긴 지 2주가 지났다. 진행해보니 그림책 글쓰기가 영어 공부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요령이 더 필요했다. 단어와 함께 쓰이는 품사를 묶어 짝꿍 단어로 기억하고 싶고, 단어의 깊고 다양한 뜻을 파내어 알고 싶은 욕심이 또 한가득 생긴다. 그러나 이제는 천천히 갈 것이다. 나만의 영어를 즐기며 나아가는 차분한 한 걸음, 용기의 한 걸음을 열렬히 응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