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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이는 루작가 Nov 20. 2024

본성(本性)과 다른 육아를 할 수 있을까

내가 꿈꾸는 육아

나는 육아 5년 차인 아둘맘이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점점 나의 꿈이 두 가지로 좁혀진다. '온유하고 편안한 엄마가 되는 것'과 '아이들을 자연에서 뛰놀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나의 성격이 그와 반대여서 이 목표대로 나가는 게 쉽지 않다고 느낀다. 본성과 다른 육아법을 추구해도 괜찮을까.   

  

지난 금요일, 전에 직장을 다니며 친하게 지냈던 동료 선생님을 만났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며 서로 공감했던 것은 소리를 지르지 말아야지 하면서 자꾸 지르게 되는, 욱하면 아이를 때리게 되는 폭력성이었다. 그러고서 자책하는 모습까지 너무 비슷했다. 선생님도 나도, 어린 시절 부모님의 싸움을 자주 보며 자랐기에 그랬을까. 우리 대에서 악습을 끊어내야 한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돌아서도 막상 현실이 되면 달라진다. 그날 저녁에도 순순히 엄마 말을 따르지 않는 아이에게 화를 냈다. 기저귀를 갈 때 둘째가 하도 장난을 치기에 주의를 주었는데, 결국 아이가 머리로 내 턱을 세게 친 것이다. 눈앞이 번쩍, 혀가 치아 사이에 있었으면 잘렸을 것처럼 너무 아팠다. 욱하는 감정에 아이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한 대 후려칠 뻔했다. 그 순간 나를 지켜보던 남편과 눈이 마주쳐 올라간 손을 겨우 꾹꾹 내리누른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감정이 올라온 것은 처음이 아니다. 첫째가 돌이 되나마나 한 아기였을 때 아이의 뒤통수를 때리고, 내 얼굴을 때렸다고 같이 아이의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감정 컨트롤 실패, 이중인격자'라고 자책하며 얼마나 화장실에서 울었는지 모른다. 내 마음과 다르게 나오는 테러에 당황스러웠다. 그 폭력성은 자존감을 바닥까지 몰아갔다. 아이가 일부러 나에게 고통을 주려고 괴롭힌 것이 아닌데, 나는 왜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자식을 약자라고 함부로 대했을까. 


자연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그렇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라 숲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여주인공의 영화를 보거나, 주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동물과 식물들을 정성으로 대할 때면 나는 왜 이런 감수성이 없는지 속상함이 밀려온다. 어렸을 적 강아지한테 물린 적도 있었고, 부모님이 동물을 좋아하지 않아서였을까. 집 바로 옆 공사 터에서 시멘트 돌을 깨며 밥을 만들고 넓은 잎을 뜯어와 싸 먹는 흉내를 내며 혼자 소꿉놀이했을 뿐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갈 때마다 '나도 할 수 있다, 재밌게 보낼 수 있다'라며 마음을 먹지만 실천은 어렵다. 여전히 나는 강아지가 목줄을 했는지 꼭 확인하고 가까이에서 한 번을 만지지 못하는 엄마가 된다. 자연과 친해져 보겠다고 숲길을 걸어도 바람에 낙엽이 바스락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자꾸만 뒤를 확인하고, 말이 '히이힝'대며 나를 반겨도 바로 돌아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내년부터 주말 중 하루는 남편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런 내가 과연 혼자 자연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을까.    

 

도전이 실패로 끝나도 괜찮다. 내가 꿈꾸는 육아의 이상향이 한 번에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소리치다가도 한 옥타브를 내려 아이를 이해하려 하고, 목장의 양들 울음소리처럼 내 몸이 떨려도 한 마리 한 마리 눈을 마주치며 진실한 인사를 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 부모님도 방법은 달랐지만 나를 엄청난 사랑으로 키워주셨을 거다. 그러니 나의 본성을 원망하지 않는다. 나에게도 '성실함',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엄마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스며든 좋은 본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뿌리로 내려 내가 바라는 육아의 기둥을 선하고 단단하게 세우고 싶다. 결국 물을 주고, 보살펴주어야 하는 것은 '나'여야 함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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