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권 활성화 방식 다변화의 필요성

멜버른의 두 얼굴, 야라와 CBD(서로 다른 골목, 서로 다른 창조경제)

by 월간 도시문화연구

멜버른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커피의 도시', '레인웨이의 예술' 같은 단어를 떠올린다. 하지만 멜버른 대도시권 안에는 같은 커피·예술·창업을 이야기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경로와 정책으로 움직이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하나는 City of Yarra(야라시)—피츠로이와 콜링우드, 리치먼드로 대표되는, 공장과 테라스하우스에서 보헤미안과 창업자가 만든 '동네형 창조 상권'이다.


다른 하나는 City of Melbourne(멜버른시)—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연방광장·콜린스/버크 스트리트 일대가 포함된, 도시의 핵심 상업·금융·문화 중심 지역인 CBD(Central Business District, 중심업무지구라는 의미)의 좁은 레인에 카페·바·스트리트 아트가 빼곡히 들어찬, 전 세계 관광객과 창조계급이 만나는 '도심형 창조·관광 상권'이다.


두 곳 모두 커피 한 잔, 거리 예술, 독립 창업으로 상징되지만 그 밑바탕엔 다른 도시 형성과정과 역사, 다른 소비자, 다른 정책철학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 차이는 한국의 을지로와 명동, 서촌과 광화문이 어떻게 다르게 접근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훌륭한 비교 사례가 된다.





도시의 형성: 공장 골목에서 카페 골목으로, CBD에서 레인웨이로


야라—산업도시에서 보헤미안 마을로

야라 지역(피츠로이, 콜링우드 등)은 19세기 말부터 멜버른의 산업 뒷마당이었다. 야라강을 따라 공장·창고·소규모 제조업이 들어섰고, 노동자와 이민자가 좁은 테라스 하우스를 가득 채웠다. 브런즈윅 스트리트, 스미스 스트리트는 노동자의 일상 상점가였다.


전후 1950–60년대, 교외화가 진행되자 야라는 빈곤·과밀·노후의 대명사가 되었다. 일부 블록은 공공주택 고층 아파트로 바뀌었고, 남은 공장과 창고들은 슬슬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런데 1970–80년대에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예술가, 음악가, 학생, 활동가들이 야라로 몰려든 것이다. 저렴한 임대료, 도심 접근성, 그리고 무엇보다 '텅 빈 공장·창고를 아틀리에·공연장으로 바꿀 수 있는 자유'가 이들을 끌어들였다. 브런즈윅 스트리트에는 라이브 음악, 인디 서점, 대안적인 카페·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반항적인 멜버른'의 상징으로.


그 후 2000년대를 거치며 야라는 서브컬처에서 창조경제로 재편된다. 창고는 로프트 아파트로, 공장은 스타트업·디자인 스튜디오로 바뀌었고, 예술가 옆에 중산층 전문직이 들어섰다. 브런즈윅 스트리트에는 룰루레몬과 파타고니아가 입점했고 스페셜티 커피·크래프트 맥주·비건 레스토랑이 즐비해졌다.




멜버른시—'9 to5' 오피스가에서 24시간 창조도시로

멜버른 CBD는 1837년 호들(Hoddle)의 격자 설계로 만들어진, 말 그대로 계획된 식민 수도였다. 1850년대 골드러시는 이곳을 제국급 금융·상업 중심지로 끌어올렸고 은행·백화점·극장·아케이드가 가득했다.


하지만 전후 교외화가 가속화되자 CBD는 점차 '출퇴근만 하고 떠나는 공간'이 되었다. 저녁·주말엔 인적이 끊기고, 레인(lane)—큰 블록 사이사이의 좁은 골목들—은 배달·쓰레기·범죄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1985년에 전환점을 맞이한다. 주 정부가 멜버른 시의 계획권을 일시 회수하고 'Strategy Plan 1985'를 발표한 것이다. 핵심은 하나, '사람을 다시 도심으로 되돌리자'였다. 고층 주거(Postcode 3000 프로젝트), 야외다이닝 허용, 카페·바 규제 완화, 그리고 무엇보다 레인(laneway)을 보행자 중심으로 재생하는 것이었다.


1994년 Gehl Architects와 함께한 'Places for People' 연구는 '레인은 잠재적 보행 네트워크'라는 결론을 내놓았고, 이후 디그레이브스 스트리트, 센터 플레이스, 하드웨어 레인 같은 골목들이 차량을 막고, 블루스톤 포장을 깔고, 카페와 예술을 채워 넣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레인 상권이 탄생했다.





정책: 활동센터 vs 레인 전략


야라—메인스트리트를 '활동센터'로

야라시는 빅토리아주의 'Activity Centre(활동센터)' 정책을 충실히 따른다. 활동센터 정책은 도시 안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일하고, 소비하고, 문화 활동을 하는 거점들을 미리 정하고, 그 지점들에 인구·일자리·상권을 집중시키면서도 교통·주거·환경을 함께 관리하는 혼합된 일상거점 전략이다. 멜버른 대도시 차원의 Plan Melbourne이 제시한 활동센터 개념을 야라시가 자기 도시 맥락에 맞게 구체화한 형태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야라시는 브런즈윅·스미스·브리지 로드·스완·빅토리아 스트리트 등 주요 거리·교차지점을 주요 활동센터(Major Activity Centre)로 지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주거+상업+문화+창의산업을 한 번에 관리하며, 그 외 작은 거리들을 이웃활동센터(Neighbourhood Activity Centre) 등으로 계층화해 관리한다. 이 체계의 목적은 도시 전역에 무작위로 상업·개발이 퍼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교통이 갖춰져 있고 기존 상권·인프라가 있는 곳에 성장과 변화를 모으는 것이다.


야라의 경제전략(2020–2025)을 보면 목표가 선명하다. "창의적이고, 포용적이며, 지속가능한 경제." 여기서 '창의'는 예술·디자인·미디어뿐 아니라 독립 리테일·카페·소셜 엔터프라이즈까지 포괄한다. 경제 정책이면서 동시에 문화·복지 정책이고, 상권 정책이면서 동시에 주거 정책이다.


실제로 브런즈윅 스트리트 스트리트스케이프 마스터플랜을 보면, 단순한 '상점가 꾸미기'가 아니다. 보행·자전거 인프라, 녹지와 빗물정원, 야간 조명, 소음 관리, 중·고층 주거와의 공존, 역사 보존까지—거리 하나를 '생활권 프로젝트'로 다룬다.


야라 활동센터 정책의 핵심 목표는 대략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압축·혼합 성장: 활동센터 안에 주거·상가·사무·창의공간을 함께 배치해 장거리 통근을 줄이고, 걷기·대중교통 중심의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상권·로컬경제 강화: 전통 메인스트리트(Brunswick, Smith 등)를 지역·도시 차원의 핵심 상권으로 유지·강화하고 로컬 소매·카페·서비스·창조산업이 공존하는 구조를 지향한다.

보행·대중교통·환경 개선: 활동센터를 자동차 통과도로가 아니라 사람 중심 거리로 바꾸기 위해 속도 저감·보도 확장·자전거 인프라·가로수·공공공간 개선을 추진한다.

주거와 포용성: 활동센터 주변에 중·고밀 주거를 허용하면서 공공·임대·저렴주택 공급을 연계해 젠트리피케이션 속에서도 다양한 계층이 살 수 있는 여지를 남기려 한다.



멜버른시—CBD와 레인을 '도시 브랜드'로

멜버른시는 다른 방향에서 출발한다. 이곳의 출발점은 '비어가는 CBD'였고, 목표는 '멜버른을 다시 글로벌 창조·관광 허브로'였다.


멜버른에서 말하는 ‘레인(lane)’은 단순히 '좁은 길'이 아니라 도시 구조 안에서 스트리트/애비뉴와 다른 역할을 하는 고유한 골목 유형이다. 역사·기능·공간 스케일에서 차이가 난다.

멜버른의 레인은 19세기 호들(Hoddle) 그리드 설계에서 넓은 메인 스트리트(예: Collins St, Bourke St) 뒤쪽에 붙은 '서비스용 골목(service lane)'이 출발점이다. 원래는 마차 진입, 배달, 쓰레기 수거, 뒷문 출입을 위한 후면 통로로, 폭이 매우 좁고(보통 차량 1대 또는 사람 둘이 겨우 지나가는 폭), 블록 사이를 관통하거나 주요 스트리트를 연결하는 짧은 길, 고층 건물 사이로 하늘이 잘 안 보이는 '틈새 공간'에 가까운 물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레인은 1980년대 이후 재생사업을 통해 카페·바·소규모 상점·갤러리·스트리트 아트가 모인 보행자 중심 골목으로 변신했다. 디그레이브스 스트리트, 센터 플레이스, 하드웨어 레인, 호시어 레인 같은 곳이 대표적이다. 레인은 이제 '멜버른의 일상+관광 경험을 압축한 공간'으로 인식된다.

스트리트(Street)가 누구나 지나가는 '전면 도로'라면 레인(Lane)은 '아는 사람만 아는 뒤골목'에서 출발해 지금은 도시 브랜드가 된 숨은 보석 같은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멜버른이 '골목의 도시'라고 불릴 때의 그 골목이 바로 레인이다.


Places for People, Laneway Revitalisation, 그리고 최근의 Flash Forward 프로그램까지 멜버른시의 레인 정책은 공간 재생이자 동시에 도시 마케팅이다. 레인은 이제 '멜버른을 설명하는 한 단어'가 되었고, 그 좁은 골목들은 전 세계 카페·도시 정책에 레퍼런스가 되었다.


Flash Forward는 팬데믹 이후 침체된 도심을 예술로 회복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168명의 창작자를 고용하고, 40개 레인에 벽화·조명·음악 프로젝트를 도입한 이 정책은 예술인 지원+상권 회복+관광객 유치를 한 번에 해결하는 '복합 회복 전략'이었다.


멜버른의 레인 정책은 뒷골목을 보행·카페·예술·상업·환경이 결합된 핵심 도시 인프라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요약하면 다음 네 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사람 중심 보행 네트워크 구축: 큰 스트리트 사이 레인과 ‘little streets’를 연결해 촘촘한 보행 네트워크를 만들고, 도심을 '걷고 머무는 도시'로 전환한다.

도심 경제·상권 활성화: 레인을 카페·바·소규모 상점·갤러리가 밀집한 고밀 상권·야간경제 거점으로 육성해 9–5시 오피스 CBD를 24시간 살아 있는 지역으로 만들며 보행량 증가와 상점 체류시간 확대를 통해 소매·호스피탈리티 매출을 높이고 관광·MICE·학생 수요까지 흡수하는 “도심 회복·성장 동력”으로 레인을 활용한다.

창조도시·문화·브랜드 강화: 호시어 레인 등 스트리트 아트 골목, 레인 기반 카페·예술·축제를 통해 멜버른을 창의·관용·실험의 도시로 브랜딩함으로써 레인을 창작·전시·공연 플랫폼으로 쓰도록 유도한다.

환경·생활환경 개선(그리닝·기후 대응): Greening Laneways 프로그램은 레인을 벽면녹화, 플랜터, 빗물정원 등으로 채워 도시 열섬·빗물 관리·생태성을 개선함으로써 좁고 그늘진 레인을 작은 그린 인프라로 전환해 도심 거주·근무자에게 미시적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환경 친화형 창조도시' 이미지를 강화한다.




소비자: 서브컬처 vs 창조계급


야라의 소비자—로컬·윤리·라이프스타일

야라 상권의 소비자는 단계별로 바뀌었다.

1980년대엔 예술가·학생·활동가 같은 서브컬처 주체들이었다. 그들은 저렴한 맥주, 라이브 음악, 대안적 서점을 찾았다.

2000년대 이후엔 중산층 전문직과 창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윤리적 소비·로컬·수제를 중시했다. 스페셜티 커피, 크래프트 맥주, 비건 레스토랑, 페어트레이드 패션. 그들은 소비 자체를 정체성 표현으로 여겼다.

그 결과 야라 상권은 '로컬+글로벌, 인디+브랜드, 예술+상업'이 긴장하며 공존하는 복합 공간이 되었다. 파타고니아와 작은 갤러리가, 룰루레몬과 사회적 기업 카페가 같은 거리를 나눠 쓴다.



멜버른 CBD의 소비자—관광·창조계급·통근

멜버른 레인의 소비자는 훨씬 다층적이다.

출퇴근 직장인은 점심 샐러드와 에스프레소를 산다. 관광객은 디그레이브스와 센터 플레이스를 '멜버른 경험'으로 찾는다. 창조·디지털 노동자는 레인의 카페를 코워킹·미팅·사교 공간으로 쓴다.

그들이 원하는 건 '플랫 화이트'와 '인스타그래머블'이다. 정교한 라떼아트, 블루스톤 바닥, 간판 없는 간판, 오버헤드 조명에 최적화된 테이블, 그래피티가 배경인 샷. 레인은 소비 공간이자 SNS 콘텐츠이자 도시 브랜드가 된다.




왜 두 도시는 갈라졌나


어디서부터 달라졌을까: 도시의 탄생 조건

야라와 멜버른시의 차이는 처음 도시가 만들어질 때부터 시작된다.

야라는 애초에 산업과 노동자의 도시였다. 야라강을 따라 공장과 창고가 줄지어 섰고, 뒷편으로 노동자와 이민자가 사는 테라스 하우스가 붙었다. 공장으로 출근하고 돌아오면 집 앞의 메인스트리트(Brunswick Street, Smith Street 등)에서 술을 마시고 장을 보고 동네 사람을 만나는 구조로 되어있다. '살고·일하고·소비하는 곳'이 한 동네에 포개져 있었다.

반대로 멜버른시는 식민 수도·CBD로 출발했다. 호들 그리드 위에 넓은 스트리트와 애비뉴, 금융·행정 건물, 백화점과 극장이 들어섰다. 일자리는 도심에, 삶은 교외에. 멜버른 CBD는 ‘일하러 오는 곳’이지 ‘사는 곳’은 아니었다. 이 차이가 훗날 상권·창조도시 전략의 방향을 완전히 갈라놓는다.


쇠퇴도 다르게 왔다: 슬럼화 vs 공동화

도시는 언젠가 한 번씩 내려앉는다. 그 순간에도 두 도시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무너졌다.

야라는 슬럼화를 겪었다. 공장이 빠져나가고 중산층은 교외로 이주했다. 남은 것은 낡은 공장과 창고, 과밀한 저가 주택, 그리고 ‘가난한 동네’라는 낙인이다. 일부는 공공주택 단지로 바뀌고 나머지는 값싼 임대 공간으로 남았다.

멜버른 CBD는 공동화를 겪었다. 낮에는 여전히 바쁘지만 퇴근 후엔 불이 꺼지는 9–5 도시. 주말이면 유령 도시처럼 비어 버리는 중심가. 레인은 배달 트럭과 쓰레기, 그리고 도시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숨기는 뒷골목 역할만 했다.

한쪽은 '사람은 있는데 너무 가난하고 낡은 동네', 다른 한쪽은 '인프라는 있지만 사람이 빠져버린 도심'. 문제의 성격이 다르니 처방도 다를 수밖에 없다.


아래에서 쌓인 문화 vs 위에서 설계된 전략

이후의 경로를 갈라놓은 것은 '먼저 움직인 주체가 누구냐'였다.


야라에서는 현장이 먼저 움직였다.
값싼 공장·창고·테라스를 보고 들어온 건 예술가와 밴드, 학생, 활동가, 이민자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브런즈윅 스트리트와 스미스 스트리트에 카페와 바, 라이브 하우스, 서점,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었다. 야라는 정책보다 서브컬처가 먼저 도시를 재구성한 사례에 가깝다.

정책은 그 다음이었다. Plan Melbourne과 활동센터(Activity Centre) 개념이 들어왔을 때 야라는 이미 '힙한 메인스트리트'를 갖고 있었다. 시는 이 거리들을 주요 활동센터(Major Activity Centre)로 지정하고 주거·상업·창조산업·보행·교통·환경을 묶어 관리하기 시작했다. 제도는 이미 만들어진 문화를 뒤따르며 ‘이름을 붙이고 보호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멜버른시는 반대였다. 여기는 전략이 먼저 움직였다.
1985년 전략계획과 Gehl의 Places for People 연구가 'CBD를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자'고 선언했다. 목표는 명확했다. 도심에 주거를 늘리고 보행과 공공공간을 복원하고, 카페·바·예술로 밤과 주말을 채우는 것. 그 핵심 도구로 선택된 것이 레인(Laneway)이었다.

시가 먼저 레인에 투자를 시작했다. 차량을 막고, 바닥을 새로 깔고, 조명을 달고, 야외다이닝을 허용했다. Laneway management, Street trading, Greening laneways 같은 정책이 프레임을 만들었다. 그 위에 카페 창업자와 예술가, 관광 비즈니스가 올라탔다. 여기서는 공공 전략이 무대를 만들고, 민간이 그 무대를 채우는 구조다.


계획 도구의 차이: ‘활동센터’와 ‘레인’이 하는 일

정책 언어도 다르다. 야라의 키워드는 활동센터(Activity Centre), 멜버른시의 키워드는 레인(Laneway)이다.

야라에서 활동센터는 도시계획의 공식 단위다. Brunswick Street, Smith Street 같은 거리는 주요 활동센터로 지정되어 중·고밀 주거, 상가·사무·창의공간, 커뮤니티 시설·공원, 트램·보행·자전거 네트워크를 하나의 패키지로 관리한다. 상권 정책이 곧 생활권·토지이용·교통계획과 직결된다.


멜버른시에서 레인은 조금 다르다. 레인은 법적 구역이라기보다 Places for People, Laneway management, Greening laneways, Street trading 같은 '공공공간·상권·문화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무대'에 가깝다. 레인은 정책 도구가 아니라 정책이 실험되는 장소에 가깝다. 여기서 법과 계획은 레인을 어떻게 쓰고 관리할지에 대한 규칙과 자원, 절차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누가 이곳에 살고, 소비하는가?(계급과 문화의 층위)

둘 다 '힙하다'는 말은 듣지만 그 힙함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다르다.


야라 메인스트리트의 경로는 다음과 같다.


노동자·이민자의 동네 → 슬럼 낙인 → 예술가·학생·활동가의 유입 → 보헤미안·대안문화 상권 → 중산층 전문직·창조계급 유입 → 글로벌 힙 브랜드 입점


여기서 중요시 여겨지는 것은 '이 동네를 멋지게 만든 사람들(예술가·로컬 상인)이 끝까지 버틸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야라의 활동센터 정책은 고밀 개발을 허용하면서도 공공·임대주택, 커뮤니티 시설, 생활권 보행과 환경을 세트로 강조한다. 상권정책이 곧 포용성·복지 정책을 포함하는 이유다.


CBD 레인은 처음부터 좀 다르다.
화이트칼라 직장인, 국제 학생, 관광객, 창조·디지털 노동자가 뒤섞여 있다. 서브컬처가 오래 눌러 살던 동네라기보다 도시 전략이 연출한 무대에 다양한 소비자가 드나드는 장소에 가깝다. 여기서의 중요시 여겨지는 부분은 '진짜 멜버른인가, 관광용 세트장인가', '현지인의 일상인가, 인스타를 위한 배경인가'에 가깝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기보다 상업화·브랜드화에 대한 피로감이 더 크게 문제로 제기되는 맥락이다.


두 도시가 달라져온 결과

야라는 '공장과 노동자의 동네가 예술가와 서브컬처를 거쳐 활동센터라는 이름의 동네형 창조 상권으로 제도화된 도시'이고, 멜버른시는 '비어가던 CBD가 전략적으로 레인을 재구성해 창조계급과 관광이 섞인 도심형 창조 상권으로 만들어진 도시'이다.

둘 다 골목을 쓰지만 한쪽은 동네에서 시작해 계획으로 올라갔고, 다른 한쪽은 계획에서 시작해 골목으로 내려갔다.


이 차이를 알고 나면 한국 도시를 볼 때도 더 선명해진다. 을지로·문래·서촌 같은 곳은 야라에 가깝고, 명동·종로·광화문·성수 일부는 멜버른 CBD에 더 가깝다. 이러한 차이를 간과하고 동일한 상권 정책으로 다루려고 할수록 도시의 결이 어긋난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당신이 만들고 싶은 골목은 어디에서 출발하는 도시인가?'




한국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멜버른의 두 얼굴은 한국의 상권·도시재생 정책에 중요한 힌트를 던진다.


동네형 창조 상권 vs 도심형 창조 상권

우리는 흔히 '을지로·익선동·서촌·경리단'을 하나의 '핫플레이스'로 묶어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들도 형성 경로가 다르다.


야라형(동네형 창조 상권): 산업 유휴지·저렴한 임대 → 예술가·청년 유입 → 서브컬처 상권 → 창조경제 재편( 예: 을지로, 문래동, 서촌, 대흥동)


멜버른시형(도심형 창조·관광 상권): 기존 CBD·업무지구 → 비어가는 도심 재생 → 레인·광장 중심 보행·카페·예술 → 관광·창조계급 유입(예: 명동, 종로, 청계천-을지로 일부, 광화문)


이 둘을 같은 정책 틀에 밀어 넣을 순 없다. 동네형은 생활권 계획+창업 인큐베이터+포용성 관리가 핵심이고 도심형은 보행 네트워크+공공공간 재설계+관광·브랜드가 핵심이다.



서브컬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야라의 사례는 명확한 경고를 준다. 예술가와 청년이 만든 매력은 결국 고소득층과 글로벌 브랜드를 끌어들이고 원래의 창조자들은 밀려난다. 이를 학계에선 '창조계급의 역설'이라 부른다.


한국에서도 을지로·서촌·익선동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정책은 이 흐름을 선제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임대료 안정화(장기계약, 공공임대), 공유지·커먼스 공간 확보, 상인·예술가·창업자의 참여 거버넌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를 위한 창조경제인가'를 처음부터 묻고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



상권정책 = 경제+공간+문화

멜버른시와 야라시 모두 상권정책을 단독 정책으로 다루지 않는다. 경제전략, 공간계획, 문화정책, 교통·환경·복지가 한 데 묶인다.


한국의 상권·도시재생 사업은 여전히 '개별 점포 간판 바꾸기' 수준에 머물 때가 많다. 멜버른과 야라에서처럼 한 거리 또는 몇 개 블록 단위로 법·재정(BID·특별구역), 조례(거리 사용·야외다이닝), 공간전략(보행·경관), 문화·창업 프로그램을 통합한 패키지가 필요하다.





마치며

호주 빅토리아주의 두 도시(야라와 멜버른)는 같은 커피 한 잔 속에 다른 역사와 계급과 전략이 녹아 있음을 보여준다. 한 곳은 공장에서 카페로, 다른 곳은 CBD에서 레인으로. 한 곳은 서브컬처에서 창조창업으로, 다른 곳은 전략적 창조도시에서 관광 허브로.


한국의 골목과 상권도 마찬가지다. 을지로와 명동은, 서촌과 광화문은, 문래동과 종로는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걸 하나의 '젠트리피케이션' 또는 '창조경제'로 묶어 말하는 순간 우리는 중요한 걸 놓친다.


도시는 단 하나의 얼굴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여러 개의 경로, 여러 층의 사람들, 여러 방향의 정책이 겹쳐 있다. 멜버른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바로 그 복수성(plurality)을 인정하고 설계하는 것이다.




참고자료

논문·보고서

Arena. (2021). Melbourne’s aesthetic turn: Coffee culture, industrial chic and global city elites. Arena

City of Melbourne. (2010). Places for people (Gehl Architects report). City of Melbourne

City of Yarra. (2020). Yarra economic development strategy 2020–2025. City of Yarra

City of Yarra. (2022). Arts and culture strategy 2022–2026. City of Yarra

City of Yarra. (2024). Brunswick Street streetscape masterplan. City of Yarra

SGS Economics & Planning. (2017). CBD pedestrian analysis. City of Melbourne

Fitzroys. (2025). Melbourne CBD retail rebound continues. Fitzroys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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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elbourne.vic.gov.au/building-melbou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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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elbourne.vic.gov.au/laneway-mana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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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elbourne.vic.gov.au/outdoor-dining-permits

City of Melbourne. (n.d.). Melbourne economy snapshot. City of Melbou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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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arracity.vic.gov.au/planning-and-building/future-yarra/planning-scheme-and-amendments/activity-centre-planning

Planning Victoria. (2023, June 8). Melbourne’s strategic planning history. Victorian Government.

https://www.planning.vic.gov.au/guides-and-resources/strategies-and-initiatives/melbournes-strategic-planning-history

Victorian Government, Department of Transport and Planning. (2024, April 16). Activity centres: Planning guidance. Victorian Government

https://www.planning.vic.gov.au/guides-and-resources/guides/all-guides/activity-centres-gui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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