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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파묵, 순수박물관

by 권혜경

내게 있어 이스탄불은 오르한 파묵(Orhan Pamuk, 1952-)의 도시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있는 항구 도시 이스탄불은 구시가지나 신시가지 모두 야트막한 언덕 위에 도시가 발달해 있다. 구시가지의 중심 술탄 아흐메트 지역에는 아이야 소피아, 블루 모스크 등 유명한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고, 신시가지의 중심 탁심 광장은 고급 쇼핑가와 식당가가 즐비하다.


20190709_204411.jpg 저녁 무렵의 이스탄불 항구


에미네뉘 선착장에서는 신시가지인 카드쾨이, 아시아 지역인 위스크다르 행 배들이 연신 출발하고 도착한다. 활기차고 개방적인 이스탄불의 풍경 속으로 하루 몇 차례씩 모스크에서 울려 퍼지는 ‘아잔’ 소리는 새삼 이곳이 이슬람 국가임을 일깨워주었다.


매혹적인 풍광과 다양한 볼거리 외에도 이스탄불은 내게 단연 튀르키예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도시이다. 파묵은 16세기 오스만 제국 시절 궁정 화가들 사이에 발생한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내 이름은 빨강』이란 작품으로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파묵은 이 소설에서 전통적이고 평면적인 이슬람 세밀화 기법과 원근법이 도입된 사실적인 베네치아 화법이 격돌하는 동서양 문화의 충돌을 다룬 바 있다.


노벨상 수상 이후 파묵은 2008년 『순수 박물관』이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1970-90년대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퓌순이라는 여자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평생 사랑한 케말이라는 한 남성의 이야기이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더라면 그 행복을 지킬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을까? 그렇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더라면, 절대로, 그 행복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1975년 5월 26일 월요일, 3시 15분경의 한순간은... 세상이 중력과 시간의 규칙에서 해방된 것만 같았다. 더위와 사랑의 행위로 땀에 흠뻑 적은 퓌순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고 천천히 그녀 안으로 들어간 후, 왼쪽 귀를 살짝 깨물었을 때, 귀에 걸린 귀걸이가 꽤 긴 순간 허공에 멈췄다가 저절로 떨어진 것 같았다.” (p. 15,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0)


소설의 첫 부분이다.


약혼식을 앞둔 상태에서 먼 친척 여동생인 퓌순을 만나 사랑에 빠진 케말은 이후 자신의 파혼과 퓌순의 결혼 등 엇갈리는 운명에 놓인다. 그는 8년간 그녀의 집에 드나들며 그녀와 관련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들고나와 한때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에 보관한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후 그 물건들을 전시할 ‘순수 박물관’을 세운 후 박물관 꼭대기 층에서 말년을 보낸다.


흥미로운 건 이스탄불 시내에 작가 자신이 만든 ‘순수 박물관’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파묵은 이 소설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이미 소설 속 케말이 세운 박물관을 건립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박물관에 어울릴만한 오래된 건물을 구입하였고, 소설을 써나가면서 내용과 관련 있는 다양한 물건들을 사 모았다. ‘순수 박물관’은 2012년 4월 드디어 문을 열었다. 소설 속 허구의 세계가 온전히 실제의 세계로 거듭난 것이다.


이스탄불 추쿠르주마 거리에 있는 ‘순수 박물관’을 찾아가던 날 내 손에는 파묵의 책 『순수 박물관』 2권이 들려 있었다. 소설의 말미 책을 읽고 찾아오는 독자는 무료로 박물관 입장을 할 수 있으며 책 속에 특별한 스탬프를 찍어준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탁심 광장 부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순수 박물관’을 찾아 나섰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구글 지도도 잘 먹히지 않았고, 인근 주민들에게 길을 물어봐도 여기저기 애매하게 손짓을 할 뿐 정확한 안내를 하지 못했다. 한참을 헤매다 드디어 비탈진 좁은 골목길에 서 있는 붉은 색 건물을 발견하였다.


'순수박물관' 입구

















'순수 박물관' 입구 팻말



















박물관 입구에서 반신반의의 심정으로 책을 내밀었다. 창구 직원이 활짝 웃으며 무료입장권을 건네더니 책 속에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나비 문양이었다. 아! 소설 첫 장면 퓌순이 잃어버린 나비 귀걸이 한 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순수 박물관 무료티켓과 나비 문양 스탬프


'순수 박물관' 1, 2권
















박물관에 들어서자 정면 벽을 가득 채운 담배꽁초가 나타났다. 소설 68장에 나오는 4,213개의 담배꽁초였다. 퓌순의 집을 드나들던 8년 동안 그녀가 피운 담배꽁초를 케말이 몰래 갖고 와 연도별 날짜별로 정리한 것이었다. 그가 모은 수천여 개의 담배꽁초들은 평생 퓌순에게로 향했던 사랑의 시간성을 가시화하고 있었다.


"캐스킨 씨네 집 식탁에 앉아 있던 팔 년 동안, 나는 퓌순이 피운 4,213개의 담배꽁초를 가져와서 모았다. 한쪽 끝이 퓌순의 장미꽃 같은 입술에 닿고,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입술에 닿아 젖고(가끔 필터를 만져 보았다.) 입술에 바른 립스틱 때문에 붉은색으로 멋지게 물들어 있는 이 담배꽁초 하나하나는, 깊은 슬픔과 행복한 순간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특별하고 은밀한 물건들이다." (p. 199)


20190710_160846.jpg 퓌순이 피운 4,213개의 담배 꽁초



담배꽁초마다 퓌순이 언제 어디서 핀 건지 기록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자 본격적으로 전시가 시작되었다. 소설의 전개 순서에 맞춰 전시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케말을 처음 만나던 날 퓌순이 신었던 노란 구두, 그녀가 입었던 꽃무늬 원피스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1970-90년대 이스탄불의 일상에서 사용되던 소소한 생활용품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퓌순의 꽃무늬 원피스






퓌순의 노란 구두



















KakaoTalk_20251110_174227395.jpg
KakaoTalk_20251110_174139332.jpg 1970-90년대 사용되었던 이스탄불의 생활용품들


케말이 말년을 보낸 4층 다락방에는 침대와 그의 파자마, 퓌순과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세발자전거 등이 놓여있었다.


KakaoTalk_20251110_174353686.jpg 소설 속 케말이 말년을 보낸 4층 다락방


KakaoTalk_20251110_174411973.jpg 퓌순과의 어린시절 추억이 담겨있는 세발 자전거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는 퓌순의 사진에 사랑을 다해 입을 맞추고는, 재킷의 가슴 주머니에 조심스렇게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승리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 (p. 403)


실내 곳곳에 『순수 박물관』 책을 가슴에 안은 채 전시물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방문객들이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파묵의 책을 읽은 뒤 마치 성지 순례를 하듯 그곳을 방문한 것이다. 책을 통해 상상하였던 허구의 세계가 바로 눈앞에서 구체화 되고 입체화되는 순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박물관 말미에 세계 각국에서 번역된 『순수 박물관』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난아 교수의 번역으로 발매된 책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KakaoTalk_20251110_174321500.jpg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순수 박물관』


박물관을 나오자마자 이스탄불의 공기는 재빠르게 사람들로 붐비는 복잡한 현재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순수 박물관'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나온 나의 마음은 한동안 퓌순에 대한 케말의 '집착어린' 사랑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의 파격적인 상상력과 그에 못지않은 집념이 이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에 새롭고 독창적인 예술 공간을 만들어냈다.


‘순수 박물관’은 소설 속 퓌순에 대한 케말의 사랑을 담은 문학적 공간을 넘어서 20세기 후반 이스탄불의 모습을 기억하게 만드는 문화적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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