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와 마카롱!
80년대 초반 대학생 시절, 처음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의 『인형의 집』(A Doll's House, 1879)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작품의 첫 장면에 여주인공 '노라'가 '마카롱'이 든 봉지를 주머니에 넣고 하나씩 꺼내 먹으며 연신 맛있다고 하는 대목이 나왔다. 또 곧 이어 이어진 남편 '헬메르'와의 대화에서도 쇼핑가서 마카롱을 사먹지 않았느냐고 묻는 대목이 나왔다. '마카롱'! 이름도 너무나 이국적인 그 과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또 맛은 어떤지 궁금증이 일었었다.
요즘처럼 컴퓨터 검색란에 단어를 넣기만 해도 바로 해당 이미지와 설명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마카롱에 대한 궁금증은 두고두고 계속 되었다. 그러다 어느덧 우리나라에도 마카롱 붐이 불면서 연노랑 연분홍 등 예쁜 색깔에 달디 단 맛이 나는 마카롱 열풍이 불었고, 그제서야 난 마카롱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또 동시에 노라가 마카롱을 왜 그렇게 좋아했던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예쁘고 맛있는 마카롱!
입센은 흔히 ‘사실주의의 아버지’ 또는 현대 모더니즘 연극을 창시한 극작가로 알려져 있다. 초기작인 『페르 귄트』(1867)의 서정성에서 벗어나 그는 19세기 후반 『인형의 집』(1879), 『유령』(1881), 『민중의 적』(1882) 과 같은 문제작들을 통해 유럽의 연극 무대에 충격을 가하였다. 흥미나 오락 위주의 플롯 짜기, 또는 기성 윤리의 반복이나 강화에 집중하였던 기존 극들과 달리 입센의 극은 당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항상 “아버지의 인형, 남편의 인형”으로 살아왔던 여주인공 ‘노라’가 남편의 이기심을 접한 후 자신의 길을 찾아 집을 박차고 나가는『인형의 집』은 19세기의 엄격한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 20세기 페미니즘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또한 온천의 수질오염을 두고 이를 비밀에 부치려는 지방정부와 언론에 맞서 공개를 주장하는 의사 ‘스톡만’의 외로운 투쟁을 다룬 『민중의 적』 역시 개인과 거대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그가 끊임없이 천착한 인간과 사회의 문제는 많은 서구 극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버나드 쇼, 유진 오닐, 아서 밀러의 사실주의 극작품들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오늘날 입센의 작품들이 지구촌 전역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 다음으로 많이 공연되고 있는 점은 이처럼 시대를 앞선 첨예한 주제를 끊임없이 모색한 그의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몇년 전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개최된 국제연극학회(IFTR) 학술대회에 참석하였다. 1주일 간의 학회를 마친 후 나는 옆 나라 노르웨이로 건너가 며칠 지내며 모처럼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수도인 오슬로는 노르웨이가 낳은 두 예술가 입센과 뭉크의 자취를 만날 수 있어 더욱 뜻 깊었다.
특히 입센 박물관은 예상 밖의 수확이었다. 이곳은 입센이 27년간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보낸 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11년간 살았던 곳으로, 특히 박물관 2층은 그가 살았던 당시 그대로 복원된 채 가이드 투어로만 공개되고 있었다.
일체의 사진 촬영이 금지된 상태로 가이드 투어가 진행되는 바람에 입센이 생활하던 거실이나 서재 등 당시의 내부 모습을 눈으로만 담을 수밖에 없었다. 입센의 아파트는 이미 유럽에서 성공한 극작가의 귀향에 어울릴 만큼 우아하고 품위 있게 꾸며진 공간이었다.
푸른색으로 마감된 그의 서재에는 자신과 부인, 그리고 아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그가 쓰던 책상 위에는 문진이랑 필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또한 한쪽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받은 훈장도 전시되어 있었다.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입센과 부인 수잔나의 사이는 따로 사용하던 침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다지 원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상에서의 그는 매우 독선적인 인물이었고, 수잔나 역시 완고하고 엄격한 성격으로 주로 자기 방에서 책을 읽으며 소일했다.
작품 속에서 자주적인 여성을 탄생시킨 입센이었지만 정작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일까.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젊은 시절 문학 살롱에 출입하고 번역작업도 했었던 수잔나의 모습에서 어쩌면 입센은 일찌감치 진보적인 여성 ‘노라’의 모티브를 얻었을는지도 모른다.
입센은 하루 두 번 항상 일정한 시간에 칼 요한 거리에 있는 그랜드 호텔의 카페를 방문해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를 했다고 한다. 이 시기 뭉크는 카페에서 신문을 보는 입센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도 하였다. 키가 작은 편이었던 입센은 외출할 때 꼭 높이가 있는 실크햇을 썼고 가슴에는 훈장을 단 채 집을 나섰다고 한다. 오늘날 그랜드 카페는 그가 자주 앉았던 자리에 낡은 실크햇을 올려둠으로써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1층 전시실로 들어가니 한쪽 벽면에 문을 열고 나가는 입센의 이미지가 영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마치 지금도 산책에 나서는 것 같았다. 젊은 시절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주제에 천착해 유럽의 문단을 흔들었던 그가 노후를 보내기 위해 찾은 곳은 바로 자신이 미련 없이 떠났던 조국이었다. 하지만 오슬로에서 보낸 그의 말년 역시 하루 두 번의 규칙적인 그랜드 카페 산책에서 알 수 있듯이, 끊임없는 사색과 동료 예술가들과의 지속적인 토론으로 이루어진 ‘현재진행’의 삶이었다.
입센 부부의 사망 이후 가구와 소장품들은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입센 연극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많이 올랐던 한 배우가 1990년 이곳을 매입했고, 이후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던 입센의 물건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심지어 벽지와 커튼, 테이블보까지 고증을 거쳐 당시처럼 재현했다고 하니 입센 박물관에 대한 노르웨이인들의 애착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입센 박물관을 나와 오슬로 시내에서 만난 활기차고 건강한 북유럽 여성들! 지구상에서 가장 조화로운 양성평등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19세기 말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노라’를 만들어낸 입센의 진취성에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