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도시

by 권혜경

클림트와 실레, 빈의 황금기를 만들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

빈에 대한 첫인상은 도로가 넓고 건축물들이 큼직큼직하다는 점이었다.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프라하나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등에 대한 기억이 남아서였는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훨씬 더 큰 것 같았다. 특히 비엔나 링(The Vienna Ring) 또는 링슈트라세(Ringstrasse)로 불리는 5.3 km의 원형 대로 주변으로 빈 시청과 국회, 국립 오페라 하우스, 자연사박물관 등이 즐비하게 늘어선 역사 지구가 있었다.


40613-ringstrasse-mit-parlament.webp 오스트리아 국회 건물 (사진: www.wien.info)


40625-rathaus-rathausplatz-sommer-sonnenuntergang.webp 오스트리아 빈 시청 (사진: www.wien.info)


이 원형 대로는 19세기 중반 빈과 도시 바깥을 구분하던 성벽을 허물고 만들어진 것으로, 대로가 감싸고 있는 역사 지구는 성공적인 도시 계획의 사례로 유네스코 월드 헤리티지로 지정된 곳이다. 거대한 건축물들과 문화적인 랜드마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을 보며 동시에 ‘아하, 이곳이 바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곳이구나!’라는 깨달음이 뒤따랐다.


vienna_map.jpg 링 주변으로 시청과 국회, 빈 대학, 박물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출처: www.independent.co.uk)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후신으로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인(독일인)과 헝가리인을 주축으로 존속했던 준입헌 군주제 국가였다.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1878년에 포함) 등을 포함하는 거대 국가였다.


outbreak-empire-World-War-I-Austria-Hungary-defeat.jp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도 (출처: www.britannica.com)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빈은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도 새로운 학문과 예술이 꽃피던 도시였다. 빈이 이렇게 성장한 데는 무엇보다도 중세 이후 유럽을 주름잡았던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Monarchy)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특히 1741년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재위 1740-1780) 여왕이 등극하고 그녀의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Franz Stephan)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로 등극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계속 유럽의 주된 왕국으로 건재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빈의 교육받은 부르주아 계층이 보여준 심미적 문화의 발전은 두드러졌다. 빈의 지식인들은 심리학, 음악, 문학, 건축학, 회화 등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유럽 문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음악에서는 18세기부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음악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도시였다.


KakaoTalk_20251229_182523196.jpg 빈 시내에 있는 모차르트 하우스


나아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6),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유대인 예술가와 학자들의 활동은 빈을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클림트는 1897년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오토 바그너(Otto K. Wagner) 등과 더불어 빈 분리파(Wien Secession)를 창설해 모든 정치적, 사회적 예술주의로부터 탈피한 총체적 예술을 추구하였다. 클림트는 여성의 신체를 주 소재로 다루면서 외설적이라는 평가에서 늘 자유롭지 못하였다. 특히 빈 대학교 강당 천장화 의뢰를 받아 <철학> <의학> <법학>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작품을 완성하였으나, 급진적이면서 지나치게 외설적이다는 평가를 받아 결국 작품이 전시되지 못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클림트와 벨베데레 궁전 >

빈에서 클림트의 그림을 보려면 먼저 벨베데레 궁전(Belvedere Palace)으로 가야 한다.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The Kiss)와 <유디트>(Judith)가 있기 때문이다.


1024px-Wien_-_Schloss_Belvedere_oberes_1.jpg.webp 벨베데레 궁전 정면 모습 (출처: https://secretvienna.org)
KakaoTalk_20251230_162148105.jpg 벨베데레 궁전 입구 천장. 아름다운 샹들리에와 천정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키스>는 큰 전시실 한가운데 벽에 걸려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한 작품이었다. 마치 파리 루브르 미술관의 <모나리자> 그림 앞처럼 <키스> 앞에도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클림트의 <키스> (1908)

지면이나 컴퓨터 화면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화려한 황금색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소위 '황금시대'의 대표작인 것이다. 황금빛과 기하학적 무늬, 그리고 아름다운 꽃밭 위에서 두 남녀가 키스를 하는 모습은 '열정'과 '환희'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특히 금박으로 장식된 두 연인의 몸은 남성의 경우 사각 패턴으로, 그리고 여성의 경우 원형 패턴으로 채워져 있었다. 금 세공사였던 아버지에게 일찍부터 금 다루는 기술을 배웠던 클림트는 자신의 작품에 화려한 금박을 사용함으로써 최고의 사랑과 열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옆에 있는 <유디트> 역시 실제로 보니 그 감동이 더해졌다. 이스라엘을 침략한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에게 접근해 그를 유혹한 후 술에 취해 잠들게 한 뒤 머리를 베어버린 유디트의 모습이 황금빛 배경 속에 담겨 있었다.


KakaoTalk_20251229_185202020_01.jpg 클림트의 <유디트> (1901)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디트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보티첼리, 카라바조, 루벤스 등 많은 화가들의 그림에 등장하였다. 하지만 사건 그 자체를 그리는 데 집중하였던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과는 달리 클림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유디트의 모습은 고혹적이면서 도발적이었다. 적장의 머리를 들고 한쪽 가슴을 풀어헤친 채 관람객의 시선을 맞받아치는 유디트의 모습! 클림트적인 재해석의 절정이라고 하겠다.


벨베데레 궁전에는 <사과나무> <공원으로 가는 길> 등 클림트의 풍경화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키스>나 <유디트>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편안한 작품들이었다.


<에곤 실레와 레오폴트 미술관>

빈이 만들어 낸 또 다른 화가 에곤 실레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레오폴트 미술관(Leopold Museum)으로 가야 한다. 2001년 개관한 레오폴트 미술관은 루돌프 레오폴트(Rudolf Leopold) 부부가 평생 모은 5천 여점 이상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특히 20세기 전반부 오스트리아 미술품들이 많다고 한다. 클림트의 작품도 많고 특히 에곤 실레의 작품은 다른 어느 미술관보다도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AG0ilSz6Xx2Jv7I7Dx2nrTm7lWsTyXWOGIrdyB_wFQ4IiBKqVwP69NJPm2mGJGPpiZPmHhJXwS75af8E1MFPU-UCbI8XnOqStwXFoENvCNTXjgVYdrvHgVUBeCNLrNmliL7Br11yYyex=s680-w680-h510-rw 레오폴트 미술관
KakaoTalk_20251228_181000720_04.jpg 레오폴트 미술관 입장권. 클림트와 실레의 그림을 담고 있다.


사실 에곤 실레에 대해서는 약간 독특해 보이는 인물화를 그린 오스트리아 화가라는 정도의 지식밖에는 없었다. 특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표지에 실렸던 실레의 자화상이 그의 작품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KakaoTalk_20251231_180523909.jpg 민음사 출판 <인간실격>


이 작품의 내용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요조라는 인물이 어릴 때부터 인간관계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가졌고, 또 자라서도 다양한 여성 편력을 거친 후 알코올 중독과 마약에 빠져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표지에 사용된 실레의 자화상과 소설 속 주인공의 이미지를 연관시켰을 것이다. 어쩌면 실레의 자화상은 <인간 실격>이란 소설의 표지화로 선정됨으로써 '오염'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레가 클림트를 만난 건 1907년 17세 되던 해였다. 그는 당시 40대 중반의 클림트를 멘토로 만나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클림트는 실레의 그림을 사거나 자신의 그림과 교환하였으며, 후원자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실레의 초기 작품들에는 클림트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으나 이후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실레는 자신의 작업실에 십 대 소녀들을 자유분방하게 끌어들여 그림을 그리다가 음란 혐의로 체포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어린 소녀들을 유혹해서 유괴하였다는 혐의는 기각되었지만, 어린이들이 있는 장소에 에로틱한 그림들을 두었다는 죄로 24일 동안 구금 및 체포되었다. 이처럼 실레의 그림 중에는 본인이나 여성의 누드화, 또는 섹스 장면을 담은 누드화가 많다.


이곳 레오폴트 미술관에 와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은 실레의 그림 소재가 아주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동안 실레 그림의 특징으로 알고 있었던 여성의 나체와 남녀의 정사 장면을 담은 작품들 외에도 빨래가 널린 집들이나 강변 마을을 그린 풍경화도 많았다. 이런 풍경화들에서는 인물화 속 남녀들에게서 느껴지던 불안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KakaoTalk_20251230_180446006_03.jpg <애무: 추기경과 수녀>(Caress: Cardinal and Nun), 1912


KakaoTalk_20251230_180446006_01.jpg <강변의 담장>(House Wall on the River), 1915


_23cEfO_P9cT98xyxxjbVfvrLt8 <바닷가 집들>(Houses by the Sea), 1914


다양한 소재의 그림들을 보고 나니 실레의 작품 세계가 훨씬 더 폭넓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실레라는 화가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확장된 것이다.


1918년 미국과 유럽 전역에 퍼진 스페인 독감이 빈을 덮쳤다. 1년 뒤 당시 임신 중이었던 실레의 아내 에디트가 사망하였고, 사흘 뒤 실레 역시 사망하였다. 한창 왕성하게 그림 활동을 이어나가려 하던 28세 때였다.


클림트 역시 같은 해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뇌경색과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그들은 새로운 화풍과 급진적인 주제의식으로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두 예술가들이 있어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 세계는 더욱 매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