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윈난(雲南) 성 리장(麗江)에 들어서면 어느 곳에서나 저 멀리 만년설에 덮인 옥룡설산이 보인다.
옥룡설산의 최고봉인 샨지두 봉은 해발 5.596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옥룡설산 일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풍경 명승구로서 중국 최고 레벨(5A급)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도 속해 있다. 높은 산이긴 하나 버스로 산 중턱에 올라 다시 설치된 케이블카를 타면 수월하게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
해 뜬 직후 황금빛으로 빛나는 옥룡설산의 모습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부랴부랴 버스로 약 40분을 달려 산 입구에 도착했다. 다시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4,500 미터 높이의 빙천공원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었다. 높은 산이래야 2,744 미터의 백두산을 두어 번 방문한 것이 전부이고 4,000 미터 이상되는 고산 지역은 처음이라 다소 걱정이 앞섰다. 여행 전 미리 동네 병원에 들러 고산병 약도 처방받아 등산 전날부터 복용하고 소형 산소통도 준비한 터였다.
케이블카를 타기 직전 이제 막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찬란한 황금빛으로 불타오르는 옥룡설산, 그 유명한 '일조금산'(日照金山)의 모습을 접하자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도착한 빙천공원에는 이미 수많은 여행객들이 몰려와 있었다. 평소 습관대로 몸을 움직이다가 갑자기 몸이 둔해지는 것을 느꼈다. 호흡도 조금 가빠지고 몸 움직임 자체가 느려졌다. 말로만 듣던 고산증 증상이었다. 해발 4,500 미터의 높이를 여지없이 몸으로 체감하는 순간! 가급적 천천히 움직이며 자주 산소통을 코와 입에 가까이 대고 산소를 깊이 흡입하였다.
만년설을 이고 빙하를 낀 채 서 있는 옥룡설산의 위용은 너무나 장대하면서도 벅찰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행객들 가운데는 백 여 미터 더 계단을 타고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올라온 전망대 부근에서 천천히 움직이며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만큼 고산지역에서의 호흡이 쉽지 않은 탓이었다.
알려진 대로 '차마고도'(茶馬古道)는 중국과 티베트, 인도를 잇는 전근대 시대의 무역로이다. '마방(馬幇)'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말과 야크를 이용해 중국 윈난과 쓰촨의 차와 티베트 지역의 말을 서로 사고팔기 위해 지나다녔던 길이다. 해발고도 4,000 미터가 넘는 매우 험준하고 가파른 산길이지만 마방들이 오랜 기간 지나다니면서 한편으로는 각종 문화 교류도 활발하였다.
차마고도의 길들은 크게 여덟 개의 노선으로 나뉘는데 마방들이 주로 이용하던 경로는 시솽반나(西雙版納), 쓰마오(思茅), 다리(大理), 리장(麗江), 샹그릴라, 더친(德欽) - 티베트 - 네팔 - 인도로 이어지는 윈난성 루트와 야안(雅安), 다두허, 캉딩(康定), 더거(德格) - 티베트 - 네팔 - 인도로 이어지는 쓰촨 성 루트였다고 한다(참고: 위키백과).
오랜 기간 마방들이 지나다니던 산길 위에 세워진 '차마객잔'에서의 하룻밤은 잊지 못할 기억이다. 해질 무렵 옥룡설산의 웅장한 뒷면을 마주 바라보는 해발고도 4,000 미터의 험준한 산자락에 세워진 객잔은 소박한 시설과 따뜻한 인정이 묻어나는 곳이었다. 휘영청 밝은 달과 무수히 많은 별들이 쏟아져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연신 감탄을 연발하던 하룻밤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다음날 아침을 일찍 먹은 후 '차마객잔'을 떠나 두 시간 정도 차마고도 트래킹을 하였다. 눈앞으로는 장대한 산자락이 이어지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면 수 백 미터 낭떠러지 아래 협곡이 아찔했다. 수십 마리 말 등에 가득 교역품을 실은 채 위태로운 산길을 수없이 지나다녔을 그 옛날 마방들의 노동과 수고로움을 조금이나마 체감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차마고도 트래킹 노상에는 특히 중국 젊은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가다 멋진 전경이 나오면 하나같이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고 또 자주 릴스도 함께 찍으며 다니고 있었다. 차마고도라는 옛 길이 21세기 현재 젊은이들의 인스타와 릴스 영상으로 다시 소환되는 인상 깊은 순간이었다.
리장고성(丽江古城)은 리장의 구 시가지로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나시족에 의해 건설된 곳이다. 고성이라는 명칭이 붙지만 실제 리장을 둘러싼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시족의 중심이 목 씨(木氏)들인데 목 씨가 통치하는 지역을 성으로 둘러싸면 목(木)이 곤(困), 즉 피곤해진다고 여겨 성벽을 축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리장고성은 1997년 12월 3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커다란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중앙 광장 벽에는 이를 축하하는 장쩌민 전 주석의 글씨가 새겨진 기념물이 서 있었다.
돌이 깔린 좁은 길 양 옆으로 전통적인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 1층은 기념품이나 특산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주점이나 식당 건물들은 붉은 홍등을 드리운 채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늦은 오후부터 서서히 인파가 늘어 저녁 무렵이 되니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리장고성의 좁은 길과 넓은 광장을 가득 채웠다.
저녁 7시가 되자 중앙 광장에 모닥불이 지펴지고 나시족들의 전통 춤 공연이 있었다. 나시족 여인네들이 전통 복장을 한 채 음악에 맞춰 간단한 동작으로 이루어진 춤을 췄다. 쉬운 멜로디가 반복되는 구조여서 그런지 관광객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함께 어울려 춤을 추기도 하였다. 영상을 찍고 있던 나 역시 반복되는 그 음률을 점점 더 익숙하게 따라 하고 있었다. 나시족의 전통문화도 소개하고 또한 여행객들과의 화합도 도모하는 멋진 시간이었다.
리장고성을 방문하기 전부터 나는 동파문자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지상에 남아있는 최후의 상형문자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동파문자는 이곳 나시족들의 전통종교인 동파교의 제사장 '동파'(東巴)가 써 온 문자이다. 리장의 상점 간판에도 동파문자가 한자와 병기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며, 고성 내 이곳저곳 담장에도 동파문자를 소개하고 있었다. 오래된 글자이나 형상을 표현한 문자들이 많아 오히려 이모티콘 같은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동파문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리장 시내에 있는 '리장 동파문화 박물관'을 찾았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동파교의 유래와 역대 동파들의 사진,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던 동파 제의 도구들이 자세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동파들이 사용해 온 동파 문자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해 온 나시족의 동파문자는 오늘날 다양한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1,340-3,680 자가 확인되고 있다. 문자수는 많지 않지만, 동파문자는 자연 현상이나 물체, 나아가 인간의 신체나 행동, 감정 등도 표현할 수 있다. 박물관 전시 내용을 살펴보니 동파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나 이집트 상형문자 등과도 비교를 해 놓았다.
나시족의 동파들은 동파문자를 이용해 고대의 신화나 전설, 전통적인 종교제의, 천문역술, 민속풍습, 의학 등을 기록한 동파경을 남겼다. 약 1만 4000여 권의 동파경이 나시족들의 전통적인 종이인 동파지 위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특히 동파문자는 19세기 중엽 이곳을 찾은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유럽에 처음 알려지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있는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박물관의 한 강의실에서 유치원생 및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에게 노래와 율동으로 나시족 문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잠시 들어가 보았더니 어린이들이 앞에 선 선생님의 말과 노래를 열심히 따라 하는 중이었다. 나시족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조상들의 언어인 동파문자를 접하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오늘날 리장 지역의 동파교는 매우 쇠퇴한 상태라 동파들의 사회적 비중도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상당수의 동파들이 전통 동파지를 판매하는 가게에서 손님들에게 동파문을 써주는 일을 한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젊은 나시족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동파문화 박물관을 찾는 모습에서 동파문이 후대에도 계속 지속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엿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