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길 떠나는 가족>과 이중섭
이윽고 객석의 불이 꺼졌다.
무대 위 푸르스름한 동산들 사이로 나선형의 하얀 길이 나 있었다.
그 길 끝에 어린아이 모습의 인형이 나타났다. 줄을 조종하는 배우의 손에 이끌려 인형은 서두르지도 않은 채 한발 한발 그 길을 내려왔다. 어린아이 인형 뒤로 물고기와 게, 소 등의 오브제가 다른 배우들의 손에 들려 춤추듯 등장하였다. 관객의 호흡을 멎게 만드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2017년 5월 중순에 개최되었던 제14회 부산국제연극제의 개막작 ‘연희단 거리패’의 <길 떠나는 가족>의 오프닝이다. 김 의경 극본으로 연희단 거리패가 만든 이 작품은 화가 이 중섭(1916-1956)의 삶과 예술 세계를 다룬다. 1991년 초연 당시 서울연극제 작품상은 물론 희곡상과 연기상까지 수상한 바 있다.
연극은 불운했던 천재 화가 이 중섭의 동경 유학 시절과 일본 여성 마사코와의 사랑을 다루기도 하고, 한국전쟁 발발 후 남하하여 부산과 제주에서 가난과 싸우다 결국 영양실조와 정신분열증으로 외로이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그의 이상주의적 예술혼은 전쟁과 빈곤이라는 깊은 수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극 초반에 등장한 어린아이와 물고기, 소 등은 화가가 자주 화폭에 담았던 소재들이다. 이들 오브제는 간간이 동심에 가득 찬 환상적인 장면을 만들어 내 그의 신산한 삶과 대조를 이루었다.
오래전에 본 연극이지만 '이중섭'이라는 한 천재적인 화가의 예술혼과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빈곤과 질병의 고통 등을 무대 위에 슬프도록 아름답게 그려낸 명작이다.
제주 서귀포에는 화가 이중섭의 예술 세계를 기리는 '이중섭 미술관'과 그가 서귀포에서 살았던 당시의 집을 복원한 초가집이 있다. 그리고 미술관 앞 거리는 '이중섭 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중섭 화백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1월부터 서귀포 시의 한 조그만 초가집에 세를 들어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와 두 아들과 함께 1년 정도 머물렀다. 피난민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가족들과 함께 머무르는 동안 비록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정서적으로 매우 안정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서귀포 시는 ‘미술의 해’였던 1995년 이중섭 거주지에 작은 기념 표석을 세운 걸 시작으로, 1997년에는 이중섭 거주지에 그가 살았던 초가집을 복원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이중섭 41주기 기일에 맞춰 '이중섭 거리' 지정 및 대향전시실 개관 기념식을 열었다.
이와 더불어 2002년에는 '이중섭 미술관'이 개관하였다. 개관 당시에는 이중섭의 원화가 한 편도 없었으나, 2003년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이 이중섭 작품 8점과 우리나라 작가 작품 66점을 기증했다. 2004년에는 현대화랑이 이중섭 화백 작품 1점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작가 작품 54점을 기증했다.
2012년에는 이중섭의 부인 이남덕 여사가 남편이 선물했던 팔레트를, 2013년에는 은지화 2점, 2015년에도 은지화 1점 등을 기증하였다. 그리고 2021년에는 故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비롯한 12점이 서귀포의 '이중섭 미술관'으로 왔다.(출처: 통영신문)
현재 '이중섭 미술관'은 신축 공사로 인해 2024년 11월부터 2027년 2월(예정)까지 장기 휴관 중이다. 새로 지어질 '이중섭 미술관'은 기존 미술관이 위치했던 장소에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5천982㎡ 규모로 들어설 예정인데, 기존 미술관의 규모보다 약 10배 정도 큰 규모라고 한다.
'이중섭 미술관'이 신축되면 다시 서귀포를 방문하고 싶다!
한국전쟁 당시 서귀포에서 살던 이중섭과 그의 가족은 계속되는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었다.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이중섭은 가족들에게 글과 그림을 담은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다빈치, 2000)은 이중섭의 미망인 이남덕 여사가 일본에서 출판한 책을 한국에서 다시 번역본으로 출간한 책이다.
가족들이 일본으로 돌아간 후 계속 이어졌던 이중섭과 아내 이남덕 여사 간의 편지와 그림뿐만 아니라 그가 두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들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 책에 담겨있는 편지들은 이중섭 부부의 열렬한 애정과 자식들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나만의 남덕아! 이 대향이 힘껏 안아줄게. 조용히 눈을 감고 나의 가슴속을 들여다보며 나의 가슴에 귀를 대로 심장이 노래하는 사랑의 노래를 들어주오. 남덕은 이 대향의 것이오. 나는 당신을 얼마나 어떻게 소중하게 해야 좋은지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소. 나는 소중하고 소중한 당신의 모든 것을 어루만지고 있소." (p. 58)
"마음에 맺힌 긴 편지 두 통을 함께 보았습니다. 당신의 힘찬 애정을 전신에 느껴, 남덕은 마냥 기뻐서 가슴이 가득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는 나는 온 세상의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p. 165)
"그리운 사진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몇 달 만에 뵙는 사랑하는 아고라의 얼굴, 기뻐서 정신없이 입 맞추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멋있는 입술, 그러나 눈에 힘이 없어 보이고 두 뺨도 여위어 보이네요." (p. 167)
1954년 아들 태현에게 보낸 이중섭의 편지에는 그의 작품 <길 떠나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와 펜으로 그린 그림이 들어있다.
"태현에게
나의 태현아 건강하겠지. 너의 친구들도 모두 건강하니? 아빠도 건강하다. 아빠는 전람회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아빠가 앞에서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
그만 몸 성해라. 아빠" (p. 218)
가족과 떨어진 그리움 속에서도 이중섭은 화가로서 치열한 창작열에 몰두하였다. 종전 후 1954년 6월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 전에 <달과 까마귀> 외 2점을 출품해 호평을 받았다. 1955년 1월에는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여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종이 그림을 비롯한 소묘 10여 점을 전시했다.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종이 그림이 춘화라는 이유로 철거되고 판매한 그림 값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며 그는 점점 자학에 빠졌으며 건강도 나빠졌다고 한다.
같은 해 친구 구상 시인의 권유로 이중섭은 대구 미국문화원에서도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때 당시 문화원 원장이었던 아더 맥타카트(Arthur McTaggart)가 은지화 3점을 구입해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하였다. 엄격한 심사 끝에 현대미술관은 재료의 특이성과 한국적인 소재 등 독창적인 작품으로 판단해 은지화 3점의 소장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담뱃갑 속 은박지에 연필이나 철필로 눌러 밑그림을 그린 후 다시 수채나 유채물감을 칠한 독특한 방식이 돋보이는 이중섭의 은지화는 궁핍한 전후 시절 그가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소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중섭은 계속되는 생활고와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실망감 등으로 인해 매우 쇠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정신분열 증세까지 보였다고 한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그는 급기야 음식물 섭취를 거부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956년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두었다.
사흘 뒤 그의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안 후 장례를 치렀고, 화장한 유해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그리고 다른 일부는 일본에 있던 부인에게 전달되어 가족 묘에 모셔졌다(p. 255).
이남덕 여사는 2022년 8월 13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101세였다.
이중섭!
그는 전쟁과 빈곤이라는 극한상황 속에서 포기할 줄 모르는 예술혼으로 하나씩 작품을 건져 올렸다. 그의 영혼 깊숙이 자리 잡은 가족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