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말즈

나의 동료에게 보내는 헌사

by 민제이

"116.5" 1990년, 그 해 성비는 역사적으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남아선호사상이 여전히 많을 때였다. 겨우 가족계획 정책으로 집마다 형제가 둘이나 셋 혹은 외동인 경우도 많았는데, 성별에 대한 집착은 끝끝내 놓지 못했던 그런 시절. 1990년은 경오년, 흰말의 해였다. 오래전부터 '범띠, 용띠, 뱀띠, 말띠 여자는 재수가 없고 인생이 험난하며 팔자가 드세서 시집을 못 간다'라는 미신이 결국 끝끝내 90년대까지 도래하였고, 그해에 내가 태어났다. 덕분에 일평생 그 위아래 학년과 비교당하며 살았다. 여자 애들이 몇 있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기가 세다든지, 자기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다닌다지 콕 짚지 않아도 될 말을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게 흘렸다. 그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잘도 어른이 되었다.


그 미신에 보란 듯이 살았다. 지난해 남편과 결혼했고 1년 넘게 다니는 회사에서 어느 정도 자리도 잡아갔다. 여전히 내 할 말은 다 하고 살아서 눈초리 받는 일이 많았지만, 더 이상 그 이유를 '기가 센 백말띠 여자'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도, 일만 잘하면 되는 회사였다. 내가 하는 일에 이유와 명분이 있으니,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고, 그해 새로 들어왔던 동갑내기 팀장 하나도 일을 잘해서 어느새 백말띠들이 일센스가 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2024년, 올해 들어 신규 입사자들이 들어왔고 그중 하나가 또 동갑내기 여자였다. 두 명이었던 백말띠는 세 명이 되었고 봄이 될 때쯤 우리는 팀장이 되었다. 크지도 않은 회사가 격변의 시기를 겪는 중이었다. 두세 달에 한 번씩 팀이 바뀌었고, 회사는 시스템을 도입하겠다는 이유로 성과지표를 자꾸만 바꿨다. 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상사와 팀원들 사이에 끼여버린 팀장들은 서로를 많이 의지하고 응원했다. 그렇게 학교를 떠난 뒤, 회사에서는 절대 만들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친구'가 생겼다.


백말띠 여자 셋만 모여있는 사내 메신저 채팅방 이름을 멋들어지게 짓고 싶었다. 이 험난한 회사 생활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우리'라는 존재만이 사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 모이니 백말띠 여럿이라는 의미를 담아 '흰말즈'로 이름을 지었다. 이 큰 회사에 유일한 90년생, 동시에 여자이면서 몇 없는 결혼한 사람 세 명. 20대를 넘어 30대가 되면서 어느 회사에서든 또래를 보기가 힘들었다. 여자 선배도 없었고, 결혼한 여자는 더 찾기 어려웠다. 지난 몇 년간 그 사실이 내게 몸소 와닿아 참 서글펐다. 유난히 젊은 친구들이 많이 일하는 업계에서 얼마나 더 일을 할 수 있을지, 얼마나 더 실무자로 성장할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하는 나날이 매년 늘어갔다. 그러던 중에 만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동료는 더없이 소중한 대나무 숲이었다.


너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고, 내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인 우리. 서로의 일상은 고스란히 나에게도 있는 일, 동시에 너도 겪는 일이 되었다. 샌드위치 팀장으로서 넘쳐나는 일과 역할론 사이를 헤매면서도 우리는 같은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버티어냈다. 함부로 조언하거나 평가하지 않았지만, 대신 손을 내밀어 남의 일도 내 일처럼 하며 회사 생활을 채워갔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마저 뵈기 싫은 여자애들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시작부터 편견 속에서 태어난 흰말즈가 오해와 편견을 더 받는다고 굽어질 애들도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에 얼마 없는 90년생 여자아이라는 사실에 굴하기 싫어 더 크게 소리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희극이라면 희극이고, 비극이라면 비극으로 흰말즈는 올해 시작되어 올해 막을 내렸다. 처음엔 내가 먼저 퇴사했고, 그다음엔 다른 친구가 아이를 갖게 되면서 육아휴직을 선언했다. 새해를 시작하며 들어왔던 친구가 마지막으로 남아 회사를 어렵고 힘들게 다녔고, 멀리서나마 들려오는 소식에 자주 찾아가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먹으며 응원했다. 그 친구 역시 정확히 1년을 채우고 내년 초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흰말즈가 하나둘 떠나며 의미 없어진 회사 생활에서 팀장으로 모든 걸 떠안으며 지낸 마지막 멤버의 그 결정을 나는 마음 깊이 응원했다.


만약 마지막 회사 생활에 흰말즈가 없었더라면, 내 편협한 생각에 틀을 깨지 못하고 조직에 질려 떠난 사람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지극히 염세주의적으로 떠났을지 모를 회사를 가장 자신만만하게, 가장 멋지게, 내 선택으로 떠나게 해 준 그 친구들에게 연말연시에 인사를 꼭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 인해 흰말즈가 회사를 떠나면서 막을 내렸어도, 회사 밖에서 새로운 시즌을 시작할 수 있기를. 그렇게 다시 응원하고, 응원받을 수 있다면 올 한 해는 좋은 시작과 끝맺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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