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마나 유치한가

일기

by Om asatoma

아들이 태권도 도장에서 돌아올 때까지 남은 시간 30분.

시를 모르는 사람이 성급히 쓰기 때문에 거칠 수 있음.


거사가 일어날 것 같이 생리가 펑펑해도

사라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면서

노시인의 산책길을 따라 걷다가 들어간 작은 책방에서

어느 출판사 시인선 책 한 권 펼쳐든 페이지가 마음에 드셨는지

내가 사줄게 하는 말씀에

받아도 되는 건가 한 번은 아닙니다 제가 사겠습니다 했지만

시집을 사주는 첫 남자라

송구하지만 잠자코 책을 받았다

순간, 아주 떨렸다.


이름나고 유명한 시인의 시집이 아니었지만

출판사가 유명한 곳이고 등단 시인들의 시를 엮는 곳이라 하니

어느 정도는 읽을만하지 않겠나 생각하면서

집에 돌아와 낭창한 시집을 펼쳐 읽었는데


그나마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책 앞 날개에 쓰인 시인의 말 여덟 줄


이십 대 여자가 쓴 글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의 과거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한 마리 새 같다고 생각했다

새장 문이 열릴 때까지는 아직 한참의 시간이 남아있는 듯하고

어린이의 투정으로밖에 읽히지 않는 시들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이 책 마지막 부분 해설을 쓴 사람은 아마도 이 작가의 스승이거나

시인을 인간적으로 아끼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시 비평이 억지스러움을 넘으면 우스워질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도대체 시인이 어떤 사람인가 찾아보았더니

십수 년 전에 등단한 후 내는 첫 시집,

세상에 나온 지 49일은 지난 시집

작가의 인터뷰 기사에 실린 사진 속 얼굴과

책 내지에 적힌 작가의 필체와

시가 완벽한 일치를 이루는.

힘없고, 어리고, 나약하고, 수동적인.


이 책이 내게 온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니

등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등단 후 연속하여 글을 발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분의

그 말씀에 더욱 끄덕여지고

그와 다르지 않을 갇혀있는 내 글에 대한 반성도 되며

무지하고 무식하기 때문에 이런 거친 글을 쓰고 있구나 싶고

작가의 나이를 보며 어지간한 질투를 하고 있구나 싶고

역시 나는 남성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구나

역시 나는 7, 80년대 감성의 글을 좋아하는구나

-시대에 뒤떨어져 있구나

.

.

.


한참 어린 여성 작가의 등단과 출판에 대한 질투라고 생각했지만


내 인생에 시집을 사준 첫 남자가

여성 작가들의 이름을 말하며 누구의 시가 좋다고 할 때마다 은근히 느껴졌던 내 안의 嫉妬

내 인생에 시집을 사준 첫 남자가 선택하여 만이천 원 기꺼이 지불한 일에도 일어나고 있는 내 안의 嫉妬

이것보다는 나은 글을 써서 시집을 내고 말겠다고

그리하여 여자들에게 때로 시집을 사주는 지 모르는 그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내 시집을 사주는 날이 오도록 하겠다고


나이 마흔 넘은 여자가 이렇게 저렇게 幼稚하고 稚拙하고 누가 알면 羞恥스러울 이야기를

뻔뻔하게 한다.


아무 잘못도 없는 시인과, 그 시인의 소중한 첫 시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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