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정 저 <빅스텝>을 읽고
남들은 잘 읽지도 않는 시나 소설 대신 경제, 경영 관련 서적을 읽었다면 좀 더 많은 도움이 됐을까. 이런 상상조차 사치일 만큼, 적응을 위해서는 뛰어다녀야 했다. 금융 관련 컨퍼런스를 쫓아다니면서 녹취록을 만들어서 계속 읽었다. 이런 에피소드 뒤에는 성공적으로 회사에 적응하는 이야기가 나와야겠지만, 퇴사할 때까지 난 내가 금융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아니, 금융을 정복하는 일이 가능이나 할까.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전에 회의적인 소리를 잔뜩 적었다. 어쩌면 이런 내 성향 때문에, 자신이 전문가라고 말하는 이들의 성공담 혹은 방법론에 대한 책을 잘 읽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빅스텝>은 끝까지 읽을 수 있었고, 그 이유는 책에 나온 어떤 문장들 때문이다.
"왜 스스로에게 묻지 않고 제게 묻나요? 언제까지 삶의 중요한 선택과 삶에 대한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며 살아갈 것인가요?" - <빅스텝> 100p
<빅스텝>에서 인상 깊었던 포인트는 오히려 재테크 관련 지식보다도 '이야기'였다. 이렇게 읽은 걸 알면 저자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독서습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독서에서도 편식이 심해서 읽는 책의 팔 할은 문학이고, 거의 대부분이 한국 현대소설이다. 인문, 사회과학 등 다른 분야의 책도 읽지만, 이야기 전개에 집중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어떤 책이든 이야기를 중심으로 읽는다.
<빅스텝>의 저자는 은행원 출신이다.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저자도 '주인공'이라고 표기해야 할 것 같다. 은행원이기에 투자와 대출을 비롯한 금융과 관련된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다양한 고객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을 거쳐서 저자가 주로 수익을 창출한 부분은 '경매'다. 경매 관련 프로세스와 저자의 경험담이 적혀있는데, 재테크 수단을 떠나서 아예 낯선 분야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더라도 경매로 재테크를 해서 버는 게 아니라, 경매를 에세이나 소설의 재료로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역시 나는 돈 벌기는 글렀다.
저자가 은행원 출신이라는 것과 경매를 선호한다는 게 흥미로웠던 이유는 재테크 측면이 아니라, 저자의 성장배경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부모님이 산 건물이 IMF 때 넘어가면서 집안 전체가 고생을 한다. 저자는 은행원이 된 이후로 은행에 오는 고객들을 보면서 그들의 사정을 생각하고, 때로는 자신의 과거를 투영하기도 한다. 경매의 경우에도 그렇다. 경매를 하면서도 과거에 넘어간 집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말하는 재테크 방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함부로 평할 지식이 없다. 당장 실행할 여건도 안 된다. 이 글을 쓰기 며칠 전에 올린 글의 제목이 '30만 원짜리 에디터'다. 제목부터 가난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난 이 책의 실전 재테크 방법보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좀 더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어떤 삶을 살고 지금 이렇게 지내는 걸까. 누군가의 삶을 관찰하는 일은 흥미롭고, 직접적으로 목격 가능한 삶의 수는 한정되어 있기에 책을 본다. 고맙게도 책의 톤 자체가 재테크 지식의 나열이라기보다 이야기 형식이라 에세이처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운이 너무 좋았던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 재테크에 성공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특별한 노하우 같은 것은 없다. - <빅스텝> 121p
저자는 재테크의 보폭을 네 종류로 분류했다. 미래에 대한 준비는커녕 수입을 탕진하기 바쁜 '제자리걸음', 노력에 비해 돈이 안 모이는 '종종걸음', 꽤 앞서 가지만 페이스 조절 등의 이슈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 못하는 '달리기', 리스크 관리부터 은행과의 금리 협상까지 빠르고 안정적인 보폭으로 목적을 향해 가는 '빅스텝'.
이러한 분류법은 재테크가 아니어도,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적용 가능하다. 재테크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빅스텝을 밟아본 이들이라면 재테크를 시작했을 때 빅스텝을 밟을 확률이 높다.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의 경험이 있는 게 중요하다는 건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 그러므로 당장 재테크 분야에서 무엇인가 실행하기 힘들다면, 무슨 분야에서든 일단 발을 내딛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요행은 없다. 그러므로 빅스텝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당장 한 발 내딛는 일이다. 재테크의 빅스텝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일은 뭐가 있을까. <빅스텝>의 사이사이에는 책의 내용을 적용해볼 수 있는 질문과 함께, 독자가 답을 적을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당신은 왜 부자가 되고 싶은가요? - <빅스텝> 92p
부자가 되길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당연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2020년에 마주한 이 질문은 묘하게 느껴졌다. 내가 생각하는 '부자'란 무엇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극히 속물적으로 보이는 이 질문은, 답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철학적인 물음이 됐다. 자포자기의 심정인 연말이 아니라 최대한 큰 희망을 품고 싶은 새해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새해에는 경매를 공부할 거다. 경매에 대해 글로 풀어쓰면 흥미로울 것 같으니까. <빅스텝>이 어떤 책인지 묻는다면 책에 나온 재테크 방법보다 저자가 살아온 삶에 대해 말해줄 거다. 새해에는 좀 더 현실적이고 싶어서 읽은 책인데 또다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야기는 돈이 될까, 이야기도 재테크 수단이 될까. 훗날 내가 재테크에 대한 글을 쓸 날이 오면, 이야기는 돈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다짐이 빅스텝을 위한 첫걸음이 되기를. 재테크를 위한 보폭이 아니더라도, 이왕이면 삶 전체에 쓸 수 있는 큰 보폭으로 다음 걸음도 나아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