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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Oct 11. 2020

500일 만의 출근, 수수하지만 굉장한 봄을 찾아

스타트업과 프리랜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회사로

2020년 2월, 비공개로 적어둔 일기를 다듬어 써보았다.



김장독처럼 글을 묻어두고


다시 출근을 시작하면 매일 글을 쓰자고 마음먹었다. 하루에 10시간도 넘게 자고, 낮과 밤이 바뀐 채 생활한 게 1년 반 정도 된다. 생활 패턴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데 글까지 쓰려니 엄두가 안 난다. 출근을 생각하면 얼른 자야 하고, 오늘 느낀 감정이 휘발할까 봐 뭐라도 남겨야 할 것 같은 기분 사이에서 고민한다. 언제 고쳐 쓸지 모르지만 일단 생각나는 대로 휘갈기듯 써본다. 에버노트, 메모장, 브런치 등의 글쓰기 창에 나의 감정이 산발적으로 적힌다. 눈보라가 치는 겨울에 쓴 이 글을 여름이 지나서 볼지, 다음 겨울에 볼지는 알 수 없다. 김장독 묻듯이, 나의 감정을 여러 플랫폼을 독 삼아서 김치처럼 묻어둔다.



수수하지만 굉장한 편집자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어떤 출판사에서 최종면접을 보았다. 편집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주변 편집자들에 비하면 내가 가진 책에 대한 애정은 너무 소박하다. 책에 대한 소유욕만 크지, 정성 들여 타인의 글을 들여다볼 수나 있을지도 미지수이고. 


편집자로 일하는 선배가 급하게 연락이 왔고, 한번 지원해보라고 한 게 시작이었다. 경력직을 뽑는 자리인데, 경력 하나 없이 호기롭게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마감 직전에 급하게 쓴 자기소개서는 프리랜서 기간 동안 실컷 했던 액땜 덕분인지 실무면접으로 이어졌고, 결국 며칠 뒤에 최종면접까지 보게 되었다. 경제/경영서 편집자를 뽑는 자리였는데, 프리랜서 에디터로 지내면서 작성했던 산업 관련 리포트나 습관적으로 보는 관련 뉴스가 결국 도움이 됐다. 


당연하게도 최종 합격한 건 편집자 경력이 있는 경력자분이셨다. 좌절보다는 희망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오랜만에 한 구직 활동인데 경력도 없이 최종까지 간 덕분에 자존감도 높아졌고, 프리랜서 에디터로 지내면서 보낸 시간이 허송세월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주워듣고 산 게 무의미하지 않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합격 이후를 상상한 적도 있다. 친한 친구가 추천해준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라는 일본 드라마 제목이 떠올랐다. 본 적도 없는 드라마이지만, 이 제목을 패러디해서 편집자 생활을 연재하듯 써보아도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회사 생활을 잘할 생각 이전에 퇴근하고 무슨 글을 쓸지부터 생각하는 걸 보니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싶다. 스타트업에서 '있어 보이는 일'에 집중하던 내게 편집자의 일은 수수하지만 굉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있어서 책이란 늘 수수하지만 굉장한 매체니까.



500일 만의 출근


편집자가 될 뻔했던 시간을 지나고 다시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거의 한 달 전에 이력서를 넣어둔 곳에서 갑작스럽게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늘 스타트업만 다녔기 때문에 새로 직장을 구하면서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10년 이상 된, 100명 이상 규모의, 상장사 등 안정성을 기준으로 삼았다. 늘 안정성을 담보받지 못해서 힘들었으니까. 하루아침에 모든 게 바뀌는 시스템에 들어가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불안했다. 프리랜서가 느끼는 불안은 하루 단위가 아니라 시간이나 분 단위로 찾아오기도 하니까. 이전 회사를 퇴사한 가장 큰 이유는 회사가 재정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고, 적어도 그런 일을 다시 목격하고 싶지는 않았다. 


첫 출근은 2월 17일이다. 2월 16일은 일요일이고, 많은 눈이 내렸다. 오랜만에 눈을 보았다. 눈에 대한 낭만은 사라졌지만, 출근을 앞두고 보는 눈에 괜히 의미부여를 하고 싶다. 지인 결혼식에 갔다가 다음날 출근을 위해 일찍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출근을 해야 하므로 밤 10시에 자리에 누웠다. 평소에 새벽 2~3시에 잤기에 바로 잠이 올 리 없었다. 필름이 나간 것처럼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새벽인 순간이 반복된다. 10시에 1시로, 1시에서 3시로, 3시에서 5시로. 깊게 잠드려는 찰나에 알람이 울린다. 6시에 알람을 들으며 생각한다. 과연 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


잠을 깨기 위해 샤워를 한다. 프리랜서로 지내는 동안에는 면도를 일주일 동안 안 하기도 했다. 외출이 없으면 굳이 면도를 하지 않고 산적처럼 지낸다. 면도날이 닳을 일도 거의 없었는데, 이제 매일 면도를 하므로 면도날을 자주 바꿔줘야겠다. 면도날 구매가 이전보다 빈번해질 거다. 프리랜서로 지내면서 소비를 최대한 줄였는데, 월급을 받게 되니 고정지출을 늘릴 생각부터 한다. 수입이 줄어들고 나서 포기했던 영양제부터, 보는 사람마다 낡았으니 이제 좀 버리라고 했던 백팩까지 여러 항목들을 떠올린다.


평소 같았으면 자고 있었을 위에 음식을 쑤셔 넣는다. 너무 많이 먹으면 속이 놀랄 것 같고, 너무 적게 먹으면 배가 고플 거다. 면접 때 보니 회사가 조용하던데, 배에서 꼬르륵거리기라도 하면 얼마나 창피할까. 회사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지하철 연착 등 여러 변수를 고려해서 한 시간 반 전에 출발한다. 면접 때 인사팀 직원 중 한 명은 분위기를 풀어주고자 농담으로 나중에는 역에서 회사까지 2분 내로 주파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여유 부리다가 늦어서 뛰는 날 혹은 회사 사람들에게 편하게 농담을 하는 날.


회사 분위기가 어떨지 몰라서 첫날에는 면접 때 입었던 정장에 가까운 옷을 입었다. 면접 때는 13년 전에 산 구두를 신었는데, 면접이 끝난 뒤 보니 밑창이 다 부서져있었다. 아껴신다가 썩어버린 거다. 아끼다가 썩어버린 것들은 구두 말고도 너무 많다. 첫 출근 전에 급하게 독립 출간으로 책을 낸 이유도, 내 글도 아껴봐야 썩을 뿐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사람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몰려간다. 사거리에서 조금씩 방향을 달리 한다. 나와 같은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며 걸을까. 아,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걷겠구나. 몇 년 전에 나도 그렇게 걸었고, 아마 몇 달 뒤 나도 그렇게 걷고 있을 테니까.



출근 첫날은 어색해


회사에 도착해서 괜히 컴퓨터를 만지작 거린다. 옆으로 지나가는 팀원분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아차 싶다. 괜히 모니터에 집중하는 척한다. 어느 회사나 월요일이 제일 바쁘다. 월요일은 어색함이 커지기 좋은 요일이다.


첫 회의에 들어간다. 형식적인 인사를 한다. 업무에 대해 듣는데 아직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사람들과 회의를 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프리랜서 에디터로 모든 걸 혼자 해오다가 협업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하다. 손이 어색해서 노트에 별 뜻 없는 말을 적는다. 몇 년 만에 마케터로 다시 돌아왔다. 마케팅뿐만 아니라 다른 업무도 함께 하게 된다는데 잘할 수 있을까. 면접 때는 무엇이든 잘하겠다고 했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두렵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오랜만이다. 


회의가 끝나고 점심을 먹는다. 임시 사원증을 목에 걸고 어색하게 걷는다. 식사를 하며 팀원들의 이름을 듣는데 잘 외워지지 않는다. 늘 직급 없이 닉네임을 쓰는 회사에서 일해오다가 이름과 직급을 부르는 건 처음이다. 나이에 비해 경력이 적어서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모두들 나보다 직급과 나이 모두 위다. 막내라는 게 편하다. 막내로서 챙겨야 할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막내로 불리는 게 얼마만인가.


팀장님이 주신 문서들을 보다 보니 퇴근시간이 되었다. 어떤 분위기에서 퇴근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퇴근하고 싶지만 누군가 얼음땡 중에 '땡'을 외치듯 나를 쳐주기를 기다리게 된다. 지나가던 과장님이 우리는 눈치 안 보고 바로 가는 분위기라고 '땡'에 해당하는 말을 해준다. 눈치 주는 사람도 없지만 혼자 주변 눈치를 보며 롱 패딩을 챙겨 입고 팀원분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한 뒤 퇴근한다.



꽤 길었던 겨울잠


2월 17일, 첫 출근을 지나 첫 퇴근. 퇴근 후에도 눈발이 날리고 길에는 눈이 쌓여있다. 집에 있었다면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게 시간을 보냈을 거다. 회사의 좋은 점은 일단 회사에 나온 이상 무엇이든 하게 된다는 거다. 밥값을 해낸다는 건 꽤나 뿌듯한 일이라는 걸 오랜만에 느낀다. 오늘 딱히 한 일이 없지만 집에 있을 때보다는 무엇인가 해낸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진다. 마스크를 쓴 채, 롱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고 남몰래 웃는다. 


진저(g1nger)의 'winter sleep'이란 노래를 들으며 간다. 꽤 긴 겨울잠을 자다가 깬 기분이다. 있어 보이는 걸 쫓아서, 남들과 다른 걸 쫓아 스타트업에서 일했다. 요행이었고, 마치 그게 진리인 마냥 굴었다. 내가 다니는 곳보다 규모가 큰 기업을 괜히 깎아내리곤 했다. 내 삶의 경로를 봤을 때 내가 갈 수 없는 규모의 회사다 싶으면 이유도 없이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폭력적이고 편협한 합리화였다. 


이곳에서 잘 적응하고 칼퇴 후 내 생활을 즐기는 상상을 해본다. 이전 회사들에서 첫날의 좋은 기억과 달리 힘들게 전개되었던 게 떠올라서 두렵기도 한다. 좀 더 지켜보자고 하면서도 기대하는 마음은 금세 커진다. 나, 잘할 수 있겠지? 행복할 수 있겠지?


집에 돌아온다. 점심때 많이 먹기도 하고, 하루 세 끼를 먹으면 금세 살이 불어날 나를 알아서 저녁은 대충 먹기로 한다. 불규칙적으로 사느라 의도치 않게 간헐적 단식을 했는데, 부지런해지면 금방 살이 불어난다. 조심할 필요가 있다. 


전에는 24시간이 주어져도 자고 웹 서핑하고 노느라 글 한 줄 안 썼는데, 이젠 글이 쓰고 싶어 진다. 자야 하는데 밤 시간이 아깝다. 고작 하루 만에 이런 걸 보니, 나에겐 직장생활이 맞는다. 아니, 또다시 합리화를 한다. 내가 가장 부지런히 배운 건 합리화다. 세상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나의 지지자가 되어줘야 한다고 믿는다. 


결국 잠들기 전에 글을 쓴다. 비공개로 일기를 남긴다. 잔뜩 써두고 나중에 정리하기로 한다. 10시에 자야 하는데 벌써 11시 30분이다. 내일 회사에서 졸면 어쩌지. 걱정이 된다. 화장실 칸에 들어가 몰래 자는 순간도 오게 될까. 자느라 메신저 답장을 늦으면 어쩌지. 걱정이 된다. 매일 일기를 쓰면 글이 쌓여서 또 책으로 묶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와중에도 있어 보일 방법을 찾는다. 월급도 받고 글감도 찾으면 얼마나 좋은가.


얼른 적응하고 싶다. 잘하고 싶다. 오늘은 나에게 말하고 싶다. 잘하고 있다고. 시작과 동시에 말하고 싶다. 잘했다, 어차피 이젠 바빠질 텐데 당분간은 천천히 적응하자. 있어 보이는 스타트업과 프리랜서를 지나서, 내가 그렇게 멀리하고 나랑 연관 없어 보이는, 언뜻 봐서는 고리타분해 보일 수 있는 회사에 왔다. 그런데 그게 나한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삶은 전혀 특별하지 않고 사실 굉장히 평범하니까.


내 삶이 전보다 더 따뜻해지면 좋겠다. 삶도 사계절이 있을 텐데, 왜 나만 이렇게 겨울이 길까 싶었다. 계절을 정하는 나의 마음이 따뜻해지기에는 외부적인 환경이 차갑기도 했다. 서서히 봄을 향해 가고 싶다. 수수하지만 굉장한 봄을 맞이하고 싶다. 굉장히 힘든 겨울을 지났으니 이젠 순탄하고 수수한 봄을 목격하고 싶다. 굉장한 시간을 보내야 맞이할 수 있는 수수한 봄에서 다음 글을 쓰고 싶다.



*커버 이미지 : 클로드 모네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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