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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Sep 24. 2020

너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서 나는 좀 더 아파야겠다

아픔 앞에서

MBTI 결과가 마치 가장 정확한 인간 분석처럼 여겨지는 요즘이다. 나의 MBTI는 'INTJ'다. INTJ에 대한 여러 가지 편견이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는 공감보다 분석을 더 즐길 거라는 거다. 어떤 상황에 대해 감정적으로 공감하기보다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것. 


딱히 부정하고 싶지 않다. 나는 공감에 능한 사람이 아니다. 아니, 요즘 들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감'이라는 게 과연 가능이나 할까 싶다. SNS에 '공감'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면서 살고 있지만, 정작 마음으로는 공감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깔아 둔다. 아마 내가 탁월한 공감 능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까.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게 힘들기 때문에, 내게 타인의 감정이란 늘 '이해'가 아닌 '암기'의 영역이다. 사람이 사람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암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사람이 되지 않는 이상, 절대로 공감 못할 영역은 외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을까. 그런데 사람을 외우기에는, 인간은 변수로 가득 찬 존재다. 원리를 안다고 외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반례를 통으로 외워야 하는 존재다. 마치 3.14로 시작해서 규칙도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원주율처럼.


입에 발린 위로를 위로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내가 그동안 위로라고 해 온 말들을 떠올려 본다. 그 사람이 될 수 없기에 이해할 수 없는 그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인다. 아팠겠다, 힘들었겠다 등의 말을 한다. 들어주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므로, 그 사람이 말을 하면서 해소되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내가 던진 빈말 같은 위로의 말들이 공허하게 들리고, 해결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그런 아픔들이 있다.


난 왜 이렇게 위로에 서툴까, 오랜 시간 고민해봤다. 결론은 하나다. 내가 타인이 말하는 만큼의 아픔을 겪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너 대신 내가 아팠으면 좋겠어, 라는 비현실적인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음을 안다. 나는 모든 일의 해결법을 알 만큼 현명하지도 못하고, 내가 영영 상상도 못 할 아픔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서툴다.


너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서 나는 좀 더 아파야겠다. 매일 몸을 사리고 아픔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지만, 지독하게 냉정하고 차가운 내 마음에도 닿는 아픔이 있다. 모든 아픔은 상대적인 아픔이라지만, 절대적으로 아픈 아픔이 있다는 걸 안다. 내가 너에게 듣게 된 아픔이 그런 아픔이라는 걸, 무딜 때로 무딘 나의 마음조차도 안다. 위로의 말을 고르기에는 내가 가진 위로의 양과 질이 모두 형편없음을 너의 아픔 앞에서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좀 더 아파야겠다. 세상과 싸우느라 좀 더 아파야겠다. 너의 아픔에 침묵을 강요한 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싸워야겠다. 나는 앞으로도 위로에 서툰 사람으로 남겠지만, 너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아픔 앞에서는 신이 없다는 걸 체감한다. 아픔을 준 이들은 결국 자신이 준 것보다 큰 아픔을 겪을 거라는 말이 진리이기를 바란다. 



*커버 이미지 : 뭉크 '아픈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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