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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Oct 13. 2020

눈 환자 아무개의 병원 가는 길

420번 버스를 타고 강남으로

버스를 탈 일이 많지 않다. 지하철을 선호하는 편이고,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변수가 적기 때문이다. 버스는 막힐 수 있지만, 지하철은 막힐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출퇴근부터 지인과의 약속까지, 버스보다는 지하철을 탈 때가 많다. 


버스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버스에 앉아서 창밖을 보는 건 지하철에서는 누리기 힘든 재미다. 지하철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창밖으로 한강이 보일 때니까. 지하철에서는 주로 책을 읽고, 버스에서는 창밖을 본다. 지하철에서 제일 책이 잘 읽히는 덕분에 지하철을 더 선호하는 것도 있다. 


각막 수술 뒤에는 추석 당일을 포함해서 자주 병원에 갔고, 병원은 강남에 있다. 집에서 강남에 가려면 지하철을 탔을 때 무조건 두 번은 갈아타야 했다. 아니며 지하철에서 내린 뒤에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러나 수술을 마친 뒤 얼마 안 되었는데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었기에 집에서 강남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집에서 강남까지 한 번에 가는 유일한 버스, 420번 버스를 타기로.


420번 버스의 노선은 내가 추억을 품은 곳들을 지나간다. 선글라스를 쓰고 보느라 어둡고, 낮아질 대로 낮아진 시력에 제대로 보이는 것도 없지만 '신사'라는 버스정류장 이름만 들어도 추억이 자동재생된다. 


동묘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다. 동묘가 구제시장으로 유명해지기 전부터 옆동네다 보니 자주 오가곤 했다. 버스가 동묘를 지나 동대문,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을 향해 간다. 학교에서 막차가 끊길 때까지 노는 날에는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당시에 동대문 야시장과 청계천을 건너서 집으로 왔는데, 그 풍경은 잠이 달아날 만큼 매번 신비롭게 느껴졌다. 다들 잠든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는 분주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눈이 많이 오는 날에도 그 근처를 지날 때면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택시비가 아까워서 걷기 시작한 길이었는데, 나중에는 새벽의 운치를 느끼며 걷는 게 좋았다. 겁이 많아서 혼자 걷다 보면 무서운 순간도 많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내리는 정류장은 국립극장이다. 국립극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면 호텔을 비롯해서 여러 건물들이 보인다. 학생 때는 국립극장에서 가끔 연극을 보기도 했다. 졸업을 하면 연극을 자주 볼까 싶었는데, 무슨 연극이 상영하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다. 연극 일을 하던 선배들은 여전히 연극을 하고 있을까. 코로나는 연극하는 이들의 삶도 많이 바꿔버렸을 거다. 


신사역 근처는 대외활동 때문에 자주 갔었다. 광고 관련 대외활동이라 자주 갔었지만, 목적지인 광고대행사 건물 외에 다른 곳은 많이 가보지 못했다. 가로수길 특유의 힙한 이미지가 내게는 내내 어렵게 느껴졌다. '힙하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가로수길의 힙하다는 가게 대신 백반집과 중국집을 오가고 김밥을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알라딘 중고서점 가로수길점에서 꽤 좋은 책을 많이 얻었던 기억도. 


순천향대병원은 친구를 만나느라 한번 가봤다. 친구가 입원한 건 아니었고, 그저 약속 장소가 병원 앞이었다. 병원에서 만나서 근처에서 밥을 먹었다. 매주 만나던 친구였지만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쉽지 않다. 한 때는 무척이나 가까웠지만 자연스럽게 소원해지는 경험이 갈수록 늘어난다. 딱히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주변 사람들과 멀어질 때면 시간은 나를 홀로 만드려고 작정한 건가 싶을 때도 있다. 시간이 아니라 내 탓일 텐데, 괜히 시간 탓을 해본다. 말 한마디 없이 곁에 머무는 시간은 여러모로 탓하기 좋다.


논현을 지나 강남으로 향한다. 신논현역과 강남역이 지하철역으로 보면 서로 멀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바로 옆 정거장 정도의 가까운 거리라는 걸 알았을 때, 내가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남들이 다 아는 걸 뒤늦게 알게 될 때 안도한다. 강남은 원하지 않아도 자주 가게 된다. 회사부터 병원까지 많은 것들이 강남에 모여있다. 강남의 분위기 좋아하지 않아서 최대한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만 하는 일들이 늘어난다. 독립을 하더라도 강남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싶고, 훗날 이직을 하더라도 강남이 아닌 곳에서 일하고 싶다. 강남이 싫다는 생각을 하면서 강남역에 내린다.


다음엔 강남이 아니라 대한극장에 내려서 공연을 보거나, 신사역에 내려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고 싶다. 계획적인 걸 좋아해서 버스 대신 지하철을 타는 내가 과연 그런 충동적인 짓을 할까 싶다. 시답잖은 생각과 함께 진료를 받고, 다시 420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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