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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ul 13. 2021

왼손을 보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주문을 걸었다

오른손 말고 왼손을 믿기로 했다

앙코르와트가 있는 캄보디아 씨엠립에 간 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 동남아 여행이다. 호텔 밖에만 나가도 땀이 주룩주룩 나는 습한 날씨. 게다가 갑작스러운 비. 여행이 불가능해진 지금, 동남아 여행을 못 가는 대신 날씨로 동남아를 느낀다. 더운데 습해서, 마스크를 쓰는 게 더 힘들게 느껴진다. 숨 쉬기 힘들 날씨와 함께 확진자도 늘어나고 스트레스도 늘어난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겼다. 평소 같았으면 그러려니 할 텐데, 기분이 확 떨어지는 날이 있다. 이럴 때는 내가 제일 의지하는 사람을 봐야 한다. 우울한 생각에 빠지면 한없이 추락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 선배에게 연락을 한다.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은 사이다. 다행스럽게도 오전에 몹시 우울했던 것에 비하면, 퇴근할 때쯤은 열심히 생각을 정리한 덕분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내 하소연을 듣고 선배는 자신이 회사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말해주었는데, 회사에서 쌈닭의 포지션이고 할 말을 하는 스타일이라 대리만족이 될 만큼 통쾌했다.


"너는 미워하는 상사 말은 그렇게 잘 들어서 한 마디에도 기분이 오락가락하면서, 내가 하는 말은 왜 안 믿냐."


선배는 나를 위로하면서 말했다. 선배는 볼 때마다 내가 잘 살고 있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내가 엉망일 때는 엉망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선배이기에 더 믿을 수 있는 말이다. 


"나쁜 거에 의미 부여하고, 네가 노력하거나 이뤄낸 거는 그 의미를 너무 축소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도 너한테 몹쓸 짓 아니니?"


좋은 말을 들어도 그 말의 의미를 축소하고, 나쁜 말을 들으면 그 말에 며칠간 사로잡히곤 한다. 나쁜 걸 품어봐야 좋을 것도 없으면서 말이다.


"뭔가 불안하고 혼란해야 감정이 더 날뛰니까 그게 살아있는 것 같고 그렇게 느낄 수 있는데, 평화로운 상태가 제일 좋은 거야. 그 가치를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데, 그런 날의 가치를 평가절하한다.


"칼만 안 들었지, 그거 완전 자해 같은 거야. 자신을 자꾸 안 좋은 감정으로 몰아넣고, 불행해야 사는 것 같고. 그런데 내가 아는 너는 오히려 진득하게 안정감 있게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야. 왜 자꾸 너를 불구덩이에 못 넣어서 난리야. 마조히스트니? 왜 이리 자기 학대를 못 해서 난리야."


가만히 못 있는 내 기질이 나를 자꾸 불안으로 인도하는 걸까.


"사람이 사는데 어떻게 파도가 안 치겠니. 근데 그 파도는 그냥 너 발 살짝 적시고 지나가는 거야. 아주 작아. 어차피 살면서 파도는 칠 텐데 너는 그 모래 위에 꾸역꾸역 뭔가 엄청난 거라고 남기려고 하는데, 그러지 마. 그냥 가만히 있어. 뭔가 하려고 하지 마. 그냥 살아. 생각 버리고 그냥 좀 살아. 어차피 너 내가 이렇게 말해도 생각 너무 많아서 다 버리지도 못할 거니까, 방향이라도 그렇게 좀 잡아."


한 달 전쯤에 스트레스 검사를 했는데 내가 스트레스에 너무 취약하다는 결과가 나왔었다.


"만인에게 예쁨 받을 생각하지 마. 네가 어느 집단을 가나 10명 있으면 2명은 너 좋아하고 6명은 아무 생각 없고 2명은 너 싫어해. 그러면 너 기력을 그 10명한테 다 쓸래? 너 좋다는 2명한테 써야지. 너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네가 뭔 짓을 하든 싫어해. 너 그 사람들한테 맞추려다가 화병 난다."


만인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 건 병이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게 내게는 아직 없다.


"너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이룬 게 되게 많아. 지금 직장도 다니고 글도 쓰고 잘하고 있잖아. 네가 이뤄내고 잘하고 있는 것도 떠올리고 좀 알아줘. 네가 알아주지 누가 알아주니. 일 잘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회사가 바보니. 일 못 하면 자르지. 일 하고 있는 게 잘하고 있다는 뜻이야. 엄청난 거 하려고 하지 마. 엄청난 거 하려다가 사단 난다."


출근하기 전에 나도 모르게 불안감에 마음이 두근두근하곤 한다.


"계산 좀 그만해. 남한테 맞춰주느라 너에 대해 잘 모르고 투자도 안 하고 취향이랄 것도 얼마 없잖아. 돈 계산하면서 제일 싼 거 먹고 싼 옷 사고 그러지 마. 앞으로는 그냥 네가 꽂히면 딱 골라서 그거 먹고, 그거 입고하면서 살아. 노트북 산다고 고민만 하지 말고 그냥 꽂히면 사. 넌 살면서 그 경험이 너무 부족해. 그거 지금 아니면 못해. 좋은 것도 먹고 입고해봐야 나중에 제대로 된 걸 고르는 눈도 생기지. 자신한테 인색한데 어떻게 남한테 잘하겠어."


빵을 먹을 때는 늘 편의점에 가서 제일 싼 빵을 사고, 옷은 싸게 샀으면 좋은 옷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며 하는 걸 하지 마. 글쓰기 강의나 연기 수업 같은 거 듣지 말고, 온전히 너한테 집중할 수 있는 걸 들어. 지금 발레 하잖아. 발레나 수영 그런 거 하라고. 너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것. 너는 남 신경 쓸 필요가 없어. 그리고 너도 알잖아. 남 신경 쓰는 거 티 나면 그것도 없어 보여. 너 그거 원하는 거 아니잖아.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 아무 지장 없어."


선배가 한 말 중에 내가 모르는 말은 없다. 선배를 알게 된 후로, 만나는 내내 해준 말들인데, 내가 실천하기를 주저해온 것들이다.


"게임하고 싶은데 시간 낭비처럼 느껴져서 안 한다면서. 너 오늘 집에 가자마자 게임 해. 엄청난 거 할 생각하지 마. 대학원, 영어 공부처럼 너 마음에도 없는데 해야만 할 것 같은 당위성이나 남 시선 때문에 하는 거 말고, 진짜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오히려 네가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으면 그게 제일 좋은 거야. 네가 생각을 비울 수 있으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거라고. 네가 좋아하는 그 생산성이라는 것도, 생각을 비우면 올라가게 되어있다고."


게임을 하고 싶은데 그게 낭비처럼 보여서 하지 않은 게 벌써 몇 년이다. 게임하는 사람보다 글을 쓰거나 다른 걸 하는 사람이 좀 더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으니까.


"네가 지금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실 알고 보면 다 쥐뿔도 없어.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던 멋대로 사는 '개썅마이웨이' 그냥 하라고. 그냥 남 신경 쓰지 말고 살아. 어차피 너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신경 쓰잖아. 그러니 좀 줄여. 그리고 느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도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내겐 필요하다. 늘 그게 부족했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나도 괜찮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살기 위해서 필수라는 생각이 요즘 들어 더 커진다.


"너 그리고 화날 때 참고 그러면 화병 걸려. 할 말은 해. 해봐, 아무 일도 안 일어나. 네가 무슨 말한다고 해서 회사 잘리거나 할 것 같니? 그런 일 안 일어나. 네 걱정에 비하면 세상은 평화로워. 사람 때문에 이직한다는 것도 웃기지 않아. 어차피 어디 가나 너 싫어할 사람은 있어. 명백한 사건이 생기거나 환경이 바뀌어서 이직하면 몰라도, 사람 때문에 이직하면 그건 해결이 안 돼."


내 걱정은 늘 극단이다. 그리고 주로 해결보다는 회피를 택한다.


"어마어마한 걸 하지 마. 사소한 걸 해. 인위적으로 힘줘서 뭘 하지 마. 힘 빼. 그냥 살아. 내가 늘 너에게 말하잖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이 말이 더 잘 먹힐 거라고 믿어. 너는 충분히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야. 긴장하고 걱정해야 더 잘 사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아는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속 편히 살아도 아주 잘 살 사람이야."


내가 믿는 사람이 나를 지지해준다는 것만큼 든든해지는 일은 없다.


"앞으로 걱정이 생기고 불안하며 왼손을 봐. 온갖 것을 다 하는 오른손 말고 왼손을. 너의 왼손에 새겨두는 거야, '릴렉스'라고. 무조건 릴렉스 하는 거야. 영화 '메멘토'처럼 몸에 문신 새겨서 아침마다 본다고 생각해. 릴렉스 하자, 생각 없이 살자, 억지로 뭔가 하려고 하지 말자, 그냥 느끼는 대로 하자, 생각보다 본능, 본능에 충실하자, 자기 학대 그만하자, 내가 좋아하는 걸 하자. 생각이 많아지면 왼손을 보고 생각해."


오른손잡이인 내게 왼손은 오른손에 비하면 비교적 순탄하다. 오른손은 살기 위해 억지로 많은 것을 해왔으나, 왼손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왼손에 주문을 걸어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왼손을 본다. 릴렉스.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생각을 비우고, 본능에 충실하게.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 생각 없이 사는 게 더 행복할 거야. 


시간이 지나면 왼손을 볼 필요도 없이 릴렉스가 되어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마음에서 올라오는 불안을 발견하고 왼손을 보며 중얼거린다. 릴렉스, 릴렉스.



*커버 이미지 : Heinrich Campendonk 'Large Heaf With Outspread 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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