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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ul 25. 2021

나는 나를 위해, 연기 대신 발레를 택했어요

선택의 기준을 잡다

그는 어릴 적부터 발레와 연기, 모두에서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그가 무슨 선택을 할지 궁금해했다. 주변에서 모두들 그의 선택에 주목했다. 자신의 일도 아니면서 마치 자신의 일처럼, 그의 선택이 가져올 가치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오히려 당사자는 침착했고, 결국 그의 선택은 발레였다. 발레를 선택한 이후로도 늘 그에게는 어린 시절 했던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따라왔다...


라고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할 것 같지만, 이건 발레와 연기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나의 이야기다. 제목에서 예상되는 분위기와는 다르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최근에 연기 대신 발레를 택했으니까. 수많은 취미의 선택지 중 두 가지까지 후보군이 좁혔다가, 결국 발레를 택했다.


취미 선택한 거 가지고 뭐 그리 유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이게 큰 신호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내가 해 온 선택 대부분은 나를 위한 게 아니라, 타인을 위한 거였다.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것보다는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는 선택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서 하반기를 맞이해서 뭔가 새롭게 배우자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연기였다. 나와 거리가 먼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내가 타인을 위해 연기하고 역할극을 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하니까.


고민하던 중 발레를 택했다. 발레와 연기 모두 해보고 싶었는데, 발레는 나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타인의 시선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연기는 애초에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고, 발레는 내가 당장 어디 가서 공연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 몸을 살피기 바쁘다. 


연기 말고도 오랜만에 시 수업을 들어볼까 했다. 시 쓴지도 오래되었는데 다시 쓰면 좋을까 싶어서. 그런데 글을 쓰면 강박을 느낄 게 뻔했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 그런데 발레는 다르다. 내 운동신경이 제로에 가깝고 몸이 저질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시는 노력하면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오만도 존재한다. 반면 발레는 내가 발버둥 쳐봐야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한계가 명확하기에 오히려 즐길 수 있다. 내가 나에게 집중하려면, 애초에 기대치 없이 즐길 수 있는 걸 해야만 한다.


몇 년 전에 오랜만에 글쓰기 수업을 들었었는데, 당시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내가 즐겨서 쓰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글을 쓰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글을 쓸 때 타인에게 닿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제일 먼저 충족시켜야 하는 건 자신이라고 믿는다. 타인을 위해 꾸며쓴 글은 어차피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에도 너무 얕다.


발레 수업을 듣는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다. 남들에 비해 엉망인 내 상태가 부끄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엉망으로 진도도 제대로 못 따라가는 건 사실이지만, 남들을 신경 쓰지는 않는다. 남들을 신경 쓸 시간도 없이, 동작을 따라 하고, 내 몸의 목, 등, 허리, 팔, 다리 하나하나 살피기만 해도 시간이 금방 지나기 때문이다. 한 주 동안 내가 나에게 가장 집중하는 시간은 발레를 하는 순간이다.


발레가 내게는 큰 분기점이 될 것 같다.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기준을,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있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느냐'로 바꿔보았다. 발레 말고 다음에 배우고 싶은 건 수영인데, 발레와 마찬가지로 내가 잘하기 어려울 걸 알기 때문이다. '잘하고 싶은 것'보다는 '잘할 수 없는 걸 알지만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해보려고 한다. 실제로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오히려 속 편히 좋아할 수 있는 아이돌 덕질하는 마음으로, 발레를 배우고 있다.


언제가 연기를 배우게 되는 날이 올 거다. 남들이 뭐라든 내게 집중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시를 다시 쓰게 되는 날도 올 거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시를 쓸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내 신체능력이 워낙 형편없기에, 당분간은 몸 쓰는 쪽에 좀 더 시간을 쏟을 것 같다. 잘할 수 없기에 속이 편해진다는 아이러니가, 늘 어떤 일을 선택할 때 생산성을 중시하는 내 성향을 고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제 막 한 달 한 발레를 다음 달에도 계속 이어서 할 예정이다. 지금 추세라면 기초반을 3년 정도는 해야 다리도 좀 찢어지고 몸 균형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전신 거울로 어설프지만 조금씩 움직이는 게 느껴지는 내 몸을 보는 건 신기한 일이다. 엉망인 걸 개선하기보다 엉망이어도 괜찮다고 해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난 앞으로도 발레를 배우겠지만 굉장히 못하는 수강생으로 남을 거다. 그리고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앞으로 내게 발레는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못해도 괜찮은 것을 하자. 어떤 것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말보다 자신이 무엇을 못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여름이다.



*커버 이미지 : Edgar Degas 'Ballet At The Paris Opé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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