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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Mar 25. 2018

동호회부터 회사까지, 닉네임의 역사

닉네임으로 사는 삶

10년 가까이 운영한 블로그에서 나의 닉네임은 '등애'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 이름이다. 초등학생 때 만화삼국지에 푹 빠진 뒤로 중, 고등학교 때 인터넷 삼국지동호회에서 토론글을 쓰며 활동도 했다. 동호회에서 제갈량, 여포, 관우 등 유명한 장수 이름은 이미 사용 중이었다. 안 유명할수록 편애하는 내가 당시 꽂혀있던 것은 유비, 조조, 손권이 죽고 진나라가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시기였다. 그 시기 촉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위나라 장수 '등애'가 내 닉네임이 되었다. 삼국지동호회부터 블로그, 게임캐릭터까지 나의 닉네임은 그 후로 등애가 되었다. 야사(野史)에 따르면 말끝마다 '애'라고 덧붙이는 버릇이 있어서 등애가 되었다고 해서 한동안은 글을 쓸 때 문장 마지막에 '애'를 붙였다.


삼국지 게임 속 '등애'는 이렇게 생겼다


처음으로 들어간 회사는 닉네임을 사용했다. 사회에 첫 발을 디디는 거라 새로운 닉네임을 고민했다. 영화감독 필립 가렐에서 따온 '필립'과 좋아하는 영화인 '500일의 썸머'를 참고해서 만든 '윈터' 중에 고민하다 겨울을 좋아하기에 후자로 결정했다. 미드 '왕자의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은 내가 다가가면 극 중 대사를 인용해 'winter is coming!'이라고 외쳤다. '윈터의 썸머는 언제 나타나요'라는 질문도 자주 받았다. 퇴사 이후에도 만나는 당시 팀원들과는 여전히 서로의 닉네임을 부른다. 훗날 서로의 칠순잔치에서도 닉네임을 부르지 않을까. 


'500일의 썸머'를 좋아해서 짓게 된 닉네임 '윈터'


지금 회사도 닉네임을 사용한다. 합류하면서 새 출발의 의미로 새로운 닉네임을 고민했다. 윤이형 작가의 단편소설 '루카'를 좋아하기에 동명의 닉네임으로 회사에 합류했다. 좋아하는 축구선수인 루카 토니와 루카 모드리치,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까지 나의 취향이 반영된 이름이다. 지난달 이탈리아 여행 때 '루카'라는 소도시를 알게 돼서 내 닉네임이 더욱 좋아졌다. 문학, 축구, 영화, 여행까지 내 취향을 압축하고 있기에.


회사에서 '루카'라고 불릴 때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가 떠오른다.


'루카'는 콘텐츠를 만드는 에디터다. 퇴근 후 일생각을 하거나 휴가지에서 회사메신저를 확인할 때의 나는 '루카'다. 스위치 끄듯이 '루카'에서 바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퇴근 후 내 모습을 보면 다음날 좀 더 나은 '루카'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느낌이다. '루카'로서 쓴 글이 아쉬운 날에 특히 더 그렇다. 지금 내가 가장 집중하는 '나'는 집에서 본명으로 불릴 때가 아니라 '루카'일 때다.


등애, 윈터, 루카 모두 나를 설명하지만 그중 어떤 나를 가장 좋아하는가. '등애'는 블로그에 겉멋 든 글을 쓰고, '윈터'는 팀장 눈치를 보고, '루카'는 시간에 쫓겨서 카피를 쓴다. '등애'는 외롭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고, '윈터'는 사회생활의 시작점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루카'는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젠 나를 설명할 때 닉네임을 빼놓을 수 없다. 내 본명보다 나를 더 잘 설명할 때도 있다. 본명은 친구나 가족 앞에서 가끔 듣는 단어가 됐다. 이젠 본명조차 하나의 닉네임 같다. '루카'가 익숙한 이들이 내 본명에 어색해하면 말해줘야지. 내가 집에서 쓰는 닉네임이라고. 


지난달 이탈리아에서 각 도시의 숙소 체크인 때마다 이름을 물으면 '루카'라고 대답했다. 갸우뚱하는 직원에게 뒤늦게 여권을 보여주며 정정하고 본명을 말했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기에 이젠 '루카'가 나의 진짜 이름 같다. 


무엇으로 불러도 좋다. 등애, 윈터, 루카 모두 나를 설명하는 말이니까. 못난 모습으로 기억할지라도 그것 또한 나이기에 반갑게 반겨줘야지. 한 때 나를 설명했던 혹은 지금도 나를 설명 중인 그 닉네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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