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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초 Sep 06. 2022

나의 가짜 취미, 글쓰기

중학교 1학년의 첫날. 나를 포함한 학생들의 책상 위엔 한 장의 종이가 놓였다. 출신 초등학교와 집 전화번호, 부모님의 성함과 직업, 형제 관계, 장래희망 따위의 항목이 나열된 회색빛의 재활용 용지. 나는 강현 중학교 1학년 1반 학생이었고 출석 번호는 생각나지 않지만 '취미/특기'란에 뭘 적었는지는 또렷이 기억난다. 취미는 글쓰기, 특기는 없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특기는 쭉 '없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뭘 잘하는지 알 수 없었다. 6학년 때까지 취미는 '모름' 또는 '만들기'라고 적었다. 만들기를 정말 좋아해서가 아니라 모른다고 적으면 꼭 '뭐라도 좋으니 아무거나 다시 써'오라는 선생님 때문에, 내가 아는 활동 중 가장 만만한 게 만들기였기 때문에 그렇게 적었다. 그런 내가 중학교 1학년의 첫날, 회색 재활용 용지 위에 글쓰기가 취미라고 자신 있게 적을 수 있었던 이유는 초등학교 졸업 직전에 받았던 '작가상'때문이다.



물 절약을 주제로 한 백일장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글쓰기를 포한 그 어떤 활동에도 취미가 없었다. 산문과 글짓기, 시 중에서 시를 고른 이유는 짧게 써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 시를 적었던 원고지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내용이 전부 기억나지도 않지만 딱 한 표현만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수도꼭지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는 것. 내 머릿속에서 나온 표현은 절대 아니었다. 어디에선가 주워 들었을 테고 어른들이 쓸 법한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제출한 나의 시는 작가상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참 거창한 타이틀이다. 개근상이나 정근상 말고는 받아본 적도 없는 내게 '작가상'이라니. 그 상장을 엄마에게 내밀었을 때 그녀도 굉장히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상장을 받은 다음날, 담임 선생님은 본인 책상으로 날 부르셨다. 요즘은 교실 풍경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교실 앞쪽에 담임 선생님의 책상이 놓여 있었다. 영어나 음악, 체육 같은 특정 과목만 다른 곳으로 이동해 배우고 나머지 과목은 전부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서 가르쳤기에 하루 중 상당한 시간을 담임 선생님과 같은 공간에서 지냈다. 그런 공간에서 그녀는 나를 자기 곁에 세워놓고 이렇게 말했다. "6학년 2학기에 전학 와서 상장 하나 못 받고 졸업하면 좀 그럴 것 같아 억지로 받게 해 줬는데 입 싹 닦는 거야? 솔직히 상 받을 정도의 글은 아니었잖아. 너도 알지."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냥 멋쩍게 웃었다. 6학년, 학교를 1년 빨리 입학해 열두 살이었던 내가 받아들이고 대응하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을 받을 정도의 글이 아니었으면 주지 말지. 내가 달라고 했나? 난 원한 적도 없는데 마음대로 줘놓고 고맙다는 말도 안 하냐고 혼내는 건 뭐야? 주기로 마음먹었으면 그냥 주고 덮으면 되지 억지로 받게 해 줬다는 말은 왜 하는 거야 도대체. 이런 생각은 6학년 2학기의 남은 날들 동안 머릿속에 계속 떠다녔다. 열두 살의 아이가 상장을 받으면, 내가 잘해서 받았다고 생각하지 누군가 뒤에서 힘을 써줬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정말로.



그럼에도 그 상장은 날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선생님이 억지로 받게 해 줬다는 생각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그저 상장 자체의 가치만이 남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글 쓰는 걸 좋아하는, 6학년 땐 작가상까지 받았던 아이라는 점을 몹시 드러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상 받을 만한 글이 아닌데 억지로 받게 해 줬다는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난 그 뒤로 글쓰기와 관련된 어떠한 대회에서도 상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나는 줄곧 내가 글쓰기와 굉장한 연이 있다고 착각했다.



미니홈피에 그럴싸한 글을 몇 줄 적고, 친구들에게 너는 글을 '좀' 잘 쓰는 것 '같다'는 다소 애매한 칭찬을 듣고, 사촌 언니와 함께 소설을 쓴 뒤 서로 바꿔 읽기도 하고, 작가 지망생이라는 이름으로 블로그에 글을 올린 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따끔한 질책'을 해달라고 했지만 댓글이 심하게 따끔해서 삭제 버튼을 눌렀던 나의 청소년기는 가짜 취미와의 싸움이었다. 취미라는 건 좋아하고 즐겨하는 일이다. 좋아하고 즐겨하면 당연히 실력이 늘겠고 그럼 그게 특기가 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었지만 딱 생각에서 그쳤을 뿐, 내 이야기가 되지는 못했다. 글쓰기가 취미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것과 달리 나는 그 일을 '즐겨'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선생님의 말이 곱씹을수록 황당하고 불쾌한 시절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반쪽짜리 상장 덕분에 열두 살의 나는 용기를 얻었다. 내가 지금까지 독서의 끈을 놓지 않고 글쓰기에 열정을 갖고 있는 것 또한 그 상장 덕분이다. 수도꼭지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는 나의 조잡하고 비루한 시 한 편이 작가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글쓰기와 연이 닿지 않았을 것이다. 글이 전하는 무게가 좋다.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가볍게 받아들일 수도, 무겁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그 선택권이 참 좋다. 로는 낙엽처럼 무심하게 밟고 지나갈 때도 있지만 글이 없는 세상은, 글쓰기를 하지 않는 나의 삶은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 글을 읽어서 얻는 것과 쓰면서 얻는 것은 분명 다르다. 나는 글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고 싶다. 남은 인생을 살아갈 원동력과, 과거에서 벗어날 힘과, 나를 돌보는 힘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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