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단순한 것들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담아낸 영화
제가 학창 시절이었을까요. 포스터를 보며 볼까 말까 하다 '로봇'이란 소재에 구미가 안 당겨 "언젠간 봐야지"라며 흘려보냈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월. E>입니다. 탄생한 지 무려 11년이나 된 이 애니메이션은 디즈니와 픽사의 합작으로 아카데미 수상과 골든글로브 수상이란 화려한 이력을 가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화려한 수상경력과 여러 사람들의 추천글을 지나가다 읽었음에도 언젠가 봐야지라며 계속해서 미뤘던 이유는 SF, 디스토피아, 로봇과 같은 소재들이 너무 식상하게 느껴져서였습니다. 쓰레기로 가득 차 버려진 지구, 그리고 홀로 남은 로봇이란 소재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소재입니다. 인간보다 인간적인 로봇이란 캐릭터도 어디선가 접했던 캐릭터입니다. 게다가 저는 SF 장르 특유의 차갑고 다크 한 느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흔한 SF 디스토피아 배경의 애니메이션은 그것도 로봇들이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감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참 따뜻하게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굳이 하나의 글귀로 설명하자면 '포근하고 따뜻한 금속'같은 영화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미루던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잘 만들었다"였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우주로 떠나고 쓰레기로 가득 찬 지구에 홀로 남아 '지구 청소'라는 자신의 명령어를 수행하는 로봇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월. E'라는 로봇입니다. 로봇의 모델명이지만 극 중 이름처럼 쓰입니다.
월 E는 등장부터 인간적입니다. 낡고 구식인 '로봇'이지만, 마음에 드는 음악을 녹음하여 들으면서 일을 하기도 하고, 쓰레기를 압축하여 정방형으로 만든 후 벽돌처럼 탑을 쌓는 '쓰레기 청소' 일을 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도 가졌습니다. 노래를 들으며 밤하늘을 보고 감상에 젖기도 하고, 애완 바퀴도 길러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면서도 감성과 로망을 잃지 않는 따뜻하고 순수한 로봇입니다.
이브는 우주로 떠난 인간들의 유람선(우주선)에서 온 로봇입니다. 강한 신식 로봇인데, 감정 없는 로봇은 아니지만 이성적이고, 명령을 수행하는 게 우선이에요. 폐허가 된 지구에서 식물을 찾으라는 명령어를 수행하기 위해 지구 탐사를 하던 도중에 월 E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월 E는 이브를 본 후 사랑에 빠집니다. 사실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사랑이야기입니다. 절망적이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는 않은 포근한 사랑이야기. 하지만 영화는 사랑'만'을 이야기 하진 않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크게 3가지 맥락입니다. 위에서 말한 '월 E와 이브의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가는 인간의 이야기', 그리고 '수동적인 개인에서 진정한 의미의 주체적인 개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 이 3가지 스토리 라인이 동시에 진행됩니다. 꽤 다양한 것들을 담고 있는 단순하지 않은 영화임에도 영화는 우리에게 참 쉽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쓰레기로 가득 차 버려진 지구, 로봇에 의존하며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과 같은 설정은 그 자체로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인간', '자연-환경에 대한 경각심'과 같은 생각할 거리를 주지만 이 영화는 비장하고 무섭게 '경고'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인상 깊었던 스토리 라인은 '주체성'에 대한 스토리였습니다.
이브를 따라 우주선으로 온 월 E를 통해 보이는 우주선의 모습은 화려하지만 모든 게 정해져 있습니다. 기계들은 명령어대로만 움직이고, 사람 역시 호버라는 이동기구를 타고 다니며 걷지도 못하고 로봇 없이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월 E가 사랑하는 이브조차도 자신의 선택이나 감정보다 주어진 명령어가 우선이에요.
이 정해진 체계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게 우주선 바닥에 있는 '선'입니다. 이건 노선 같은 역할인데, 모든 인간들과 기계들이 아무런 의지도 선택지도 없이 그저 이 '선'을 따라 움직입니다. 강제로 지배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이요. 그리고 월 E가 우주선에 등장한 후, 월 E가 의도한 게 아님에도 월 E의 영향으로 이 '선'에서 벗어나는 인간과 기계가 생깁니다.
보통 로봇이 등장하는 SF영화가 인간과 로봇의 대립과 갈등에 비중을 둔다면, <월. E>는 그렇지 않아요. 우주선의 메인 로봇인 '오토'와 인간 '선장'간의 갈등에서 전형적인 로봇과 인간의 대립이 보이긴 하지만, 그렇게 심도 있게 묘사하지 않을뿐더러 오토 때문에 인간이 주체성을 잃었다고 하기엔 무리입니다. 영화는 로봇과 인간을 구분 짓기보다 수동적인 '개인들'을 강조합니다. 그들과 다른 가장 인간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이 로봇 월 E이고요.
낡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바로 이 로봇 하나 때문에 '선'에서 벗어나는 인간과 기계가 생기고,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우주선은 변화합니다.
'모'라는 청소로봇은 월E가 남긴 흔적을 청소하기 위해 처음으로 선을 벗어나서 신나게 청소를 합니다. 월 E가 이브에게 선물로 건네준 식물로 인간들은 고향인 지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화면만 바라보며 걷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화면 밖 진짜 눈앞에 있는 것들을 보고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주선의 체계에선 '고장 난' 로봇이었던 로봇들도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우선이던 '이브'도 월 E에 대한 마음을 통해 비로소 주체적인 개인이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인 월 E는 그저 한결같이 이브를 향한 '사랑'을 표현한 게 전부라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이브를 따라 우주선에 오고, 명령을 수행하는 이브를 위해 도와주고, 심지어 너무 순수하고 귀엽게도 월 E가 바라는 것은 단지 '이브와 함께 있는 것', 그리고 '낡은 아이팟에서 본 로맨스 영화처럼 이브와 손을 잡는 것'이 전부입니다.
결국 영화에서 주체성을 되찾게 한 것은 효율적이고 완벽한 기술이 아닌 순수하고 소소한 월 E의 사랑이었습니다. 어쩌면 영화는 익숙하고 소소해 우리가 자주 잊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들의 소중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항상 편리함과 효율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인생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소소한 심지어 때론 귀찮고 비효율적인 것들이 아닐까요. 로망, 꿈, 따뜻한 감정, 자연, 내 삶의 주체성, 일상의 소중함 그리고 '사랑' 같은 것들이요.
영화는 뻔하고 익숙한 이런 가치들이 '구식'이 된 세상에서, 낡고 더러운 '구식' 로봇 월 E를 통해 이 가치들을 가장 반짝이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포인트입니다. 미래, 기계, 주체성, 환경과 같은 무거운 요소를 다루면서도, 다양한 스토리라인이 동시에 진행되면서도, 영화는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영화를 관통하는 월 E의 '사랑'은 러닝타임 내내 영화의 다정함과 포근함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치와 스토리를 배제하더라도 <월 E>라는 영화는 참 매력적입니다. 혹자는 애니메이션을 '어린이'를 위한 영화라고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분들은 알 것입니다. 잘 만든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한 영화라는 것을요. 심지어 <월 E>는 문화, 인종, 언어를 넘어서 정말 '모든 사람'을 위한 영화입니다.
배경부터가 작게는 국가, 문화, 크게는 인간, 지구라는 한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로봇이고, 배경은 지구와 우주니깐요.
게다가 <월 E>에서 가장 비중 있게 사용되는 의사소통 방법은 '언어'가 아니라 '행동'입니다. 월E와 이브는 언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주인공 로봇들의 외형도 사람의 얼굴과는 거리가 멀어 표정으로 감정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행동'과 약간의 추임새만으로 캐릭터의 성격과 감정이 너무나도 잘 전달이 됩니다. 영화가 시작되었을 땐, 제대로 된 대사도 없는 진짜 '로봇'같이 생긴 월 E와 이브 때문에 제가 눈물을 흘리게 될지 정말 몰랐습니다. 그 정도로 섬세합니다. '행동'을 표현 수단으로 사용했음에도 오히려 더 포괄적이고 편견 없이 직접적으로 감정이 전달됩니다.
가끔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냥 마음으로 직접 전달되는 감정이란 게 있습니다. 그냥 마음에 번집니다. 이 영화는 영화 전체가 그런 느낌이에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을 표현 수단으로 삼은 점이 바로 이 느낌을 잘 살리지 않았나 합니다.
<월. E>는 사소하고 기본적인 것들을 참 소중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사소하고 기본적인 것들은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거나 가지고 있는 것들이기에 더 잘 와 닿았어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도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참 다정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며 "많은 것을 담아내기 위해 어렵고 복잡한 방법을 이용해야 하는 건 아니구나. 때로는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것들이 많은 것을 담아내는구나"라는 생각이 참 많이 들었습니다.
언어보다 단순하지만 포괄적인 '행동', 화려한 신기술보다 '아날로그', 편리한 수동성보단 귀찮은 '주체성', 기술의 발전보다 '자연', 그리고 그 자체로 소중하고 순수한 '사랑'.
<월. E>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어딘지 친근하고 소중한 한결같은 것들입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것들로 많은 것들을 참 섬세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담아낸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이 '모든 사람'을 위한 영화를 꼭 한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추가로 귀엽고 사랑스러우면 다 돼! 하시는 분들도 꼭 보세요 (너무 귀여워!)
writer 이맑음
문화예술플랫폼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