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록원 Jun 10. 2019

슬픔은 쉽게 삼켜지지 않는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 리뷰


*브런치 무비패스로 감상한 영화입니다.

*스포가 있습니다.



원작이 따로 있는 영화를 보고 그 원작을 찾아보고 싶다면 그 영화는 성공한 게 아닐까 싶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는 그런 영화였다. 스토리와 감정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그저 감정이 응축되어있는 장면들이 쌓이며 결국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는 영화, 그래서 원작을 읽게 되면 어떤 감정들이 흘러들어올지 궁금해지는 영화.





영화 <하나레이 베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에 담긴 이야기 중 하나이다. 제목은《하나레이 해변》. 영화는 청량하고 여유로운 하와이 해변에서 서핑을 하는 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 급하게 나가는 한 여성과 청년의 주검이 화면을 채운다. 서핑을 하다 큰 상어에 물렸다고 한다. 상어에 물린 그의 오른쪽 다리는 없어져 있었다. 이후에 영화는 그 청년의 엄마인 '사치'라는 여성의 감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사치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아들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도, 아들의 유골함을 고르고,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그녀는 결코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조차 애써 터져 나오는 감정을 삼키고 욱여넣는다. 아들의 손도장을 찍어놓으라며 권유하는 이에게도, 이 섬을 미워하진 말아달라는 경찰로 보이는 이에게도 담담한 태도로 대화한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사치


하지만 그녀는 아들을 삼켜버린, 아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 섬을 떠나지 못한다. 매 년 아들의 기일에 맞춰 아들이 죽은 해변에 찾아와 아들처럼 서핑을 하는 청년들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는다. 10년이 지나서도 같은 시기에 와 같은 자리에서 책을 읽는 사치의 표정은 언뜻 평온해 보인다. 그녀가 섬에 올 때마다 이번에는 아들의 손도장을 찾아가라며 건네는 이에게 난 정말 괜찮다며 웃으며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 사치의 삶에 일본에서 서핑여행을 온 두 소년이 등장한다. 사치는 그들을 보며 아들을 떠올린다. 아들이 좋아했던 서핑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다 두 소년이 섬을 떠나기 전 "일본인 외다리 서퍼를 보았다"는 말은 고요해 보였던 사치의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이 일렁이게 한다.


외다리 서퍼에 대한 말을 들은 후부터 사치는 무작정 하루 종일 해변을 서성이며 외다리 서퍼를 찾는다. 하루 종일 땀범벅이 되어 무작정 해변을 돌아다니는 사치의 모습은 정말이지 절절하다. 여태껏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만을 보던 관객들에게도 사치의 감정은 무방비로 터져 나와 밀려들어온다. 그 장면을 보며 그때서야 한 가지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전혀 괜찮지 않았구나"






터져 나오는 사치의 감정을 보고 나서야 담담함 뒤로 숨겨진 사치의 행동들이 다시 보였다. 눈앞에 안 보이면 잊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들의 방을 급하게 치워버리는 사치의 모습. 그럼에도 계속해서 떠올리는 아들과의 생전 대화들.


사치는 마약에 중독됐고, 폭력을 휘둘렀으며, 외도까지 하다 죽어버린 남편에 대한 감정 역시 같은 태도로 대응한다. 외면하고 억누르기.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기억처럼, 사치는 아들의 유품과 남편의 유품을 안 보이게 정리해놨지만 버리지 못한다. 단순히 슬픔 혹은 그리움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겪었던 사실은 현실이기에 잊힐 수 없다. 없는 것이 되어버릴 수 없다.


감췄지만 버리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아들과 남편과 유품 상자처럼, 사치는 담담하게 아들의 죽음을 흘려보내려 했지만 섬을 떠나지 못한다. 무려 10년이나.


사치가 자신의 아들로 추정되는 외다리 서퍼를 찾기 위해  터져 나오는 상실감에 흔들리며 해변을 하염없이 거닌 후에 손도장을 건네던 부인에게 가 이런 말을 한다.


난 아들을 싫어했어요. 그래도 사랑했어요. 난 이 섬을 받아들이려 했는데 이 섬은 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아요. 그럼 그것도 전 받아들여야 하나요?


나는 이 말이 이렇게 들렸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어요.
하지만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과 이 감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흘려보내 지지 않아요.
이 고통 조차 받아들여야 하나요?



사치에게 이 섬과 하나레이 해변은 그 자체로 아들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사치가 섬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며 괜찮아져야 한다는 소리일 것이다. 사치는 계속해서 그러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섬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들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것이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이라 생각했지만, 감정은 그렇게 쉬이 삼켜지지 않는다.


사치가 찾아갔던 부인은 사치에게 매 년 계속해서 건네었던 손도장을 건넨다. 자신의 남편도 죽으며 훈장을 받았는데, 그 훈장보다 손도장 종이 하나가 도움이 된다면서. 사치는 아들의 손도장을 향해 "보고 싶다"라고 말하며 드디어 감정을 토해낸다. 그렇게 찾아 헤맸던 아들의 흔적을 손도장에서 보고 하염없이 오열한다.


그리고 사치는 그렇게 그리움에 흔들리고, 슬픔에 무너지고, 고통에 아파하고 나서야 비로소 괜찮아진다.








안 보이게 숨겨놨지만 아들이 찾아서 들었던 남편의-아들의 카세트를 듣는 사치의 모습은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르지 않고 마주하는 사치의 모습을 보여준다.


때로는 감정에서 오는 고통을 마주하고 인정해야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상실의 슬픔도 마찬가지이다. 외면하고 잊으려 할수록 그 감정은 결코 옅어지지 않는다. 단지 마주하는 순간이 미뤄지고 있을 뿐이다. 애당초 감정과 기억을 흘려보내는 게 가능했던가. 감정을 마주하고 괜찮아지는 것이 '상실을 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상실'이 우리와 언제나 같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뿐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이 비로소 우리를 편안하게 만든다.  



메시지가 아닌 감정 자체를 보여주는 영화였다.

다 보고 나서 어떤 구절이 아닌 감정으로 남는 영화.


그래서 좋았다.





writer 이맑음


브런치 무비패스로 감상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직접 본 후 적은 리뷰입니다

모든사진의출처는 다음영화 '포토'와 '예고편'캡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우리일 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