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얼굴들 : 감정이 구조를 지배할 때, 책임은 사라진다
감정으로 움직이는 구조의 시작
A본부장은 늘 부드러운 상사였다.
그는 직원들에게 편안하고 친근한 리더로 남고 싶어 했다.
실무보다는 영업 중심의 역할을 맡아왔고,
“싫은 소리를 하면 나와 함께 일하려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감정을 어루만지며 관계를 유지했고, 직접적인 판단 대신 분위기를 읽는 리더십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하지만 감정 중심의 리더십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한다.
그 결과, B팀장은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하는 조직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고, 주니어들은 감정으로 반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A본부장이 팀장이던 시절부터 어르고 달래며 팀을 이끌던 방식은 본부장이 된 지금까지 이어졌고, 그가 키운 건 독립적 사고가 아닌,‘위로부터 감정을 확인받으며 일하는 습관’이었다.
감정으로 반응하는 주니어들
Y대리는 B팀장 팀 내의 가장 높은 직급의 주니어였다. 업무적으로 챌린지를 받으면 스스로 해석하기보다 리더에게 정리된 답을 요구하는 습관이 있었다.
어느 날, 대표의 지시로 갑작스러운 야근이 잡혔고 급히 투자 기획서를 만들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B팀장 역시 상황을 막 전달받은 터라 투입 예산과 기대 수익의 구조를 어떻게 짜야할지, 변수를 어떤 기준으로 둘지 짧은 시간 내에 고민하고 경우의 수 고려까지 필요한 상태였다.
그때 Y대리가 이렇게 말했다.
“팀장님, 이거 내용 어떻게 쓸지 정리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B팀장이 “나도 지금 막 들은 상황인데, 이런 문서의 목차나 구성은 스스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자, Y대리는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팀장님이 내용을 정리해 주셔야 쓰죠..! 저희도 지금 처음 들었는데요...”
B팀장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차분히 말했다.
“그럼 Y대리님, 목차나 내용을 팀원들이랑 빠르게 논의해서 정리해 보고 ‘팀장님, 이렇게 목차랑 내용 구성해 봤는데 한번 봐주시겠어요?’ 이렇게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짧은 대화 속에서, B팀장은 Y대리가 스스로 사고하기보다 ‘확실한 가이드’를 요구하며 불안을 해소하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감정을 근거로 한 불만은 곧 업무의 기준을 흔들었고, 그날의 야근은 단순한 문서 작업이 아니라 조직 내 감정 구조를 드러내는 장면이 되었다.
Y대리는 이후에도 업무를 감정적으로 해석하며 리더의 피드백이나 업무 지시보다 분위기를 우선시했다. 결국 그녀는 건강을 사유로 무단결근과 상습지각을 하며 휴직과 복귀, 그리고 갑작스러운 퇴사로 조직에서 사라졌다.
그 후 남은 건 그녀의 감정이었다.
그 감정의 잔향이 S대리와 H사원에게 이어졌다.
감정이 판단을 대체할 때
Q사 프로젝트를 처음 맡게 되었을 때, 이미 회사 안에서도 악명이 높은 프로젝트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기에 B팀장의 팀원들도 역시 불안해했다.
하지만 B팀장은 팀원들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여러분, 원래 Q프로젝트가 내용이 많기는 해도 유사한 프로젝트를 많이 경험한다면 그렇게 어려운 과업의 프로젝트는 아니에요. 이 프로젝트가 다들 힘들다고들 하지만, 힘든 업무인만큼 끝내고 나면 여러분도 지금보다 훨씬 성장해 있을 거예요. 내가 가이드해 줄 테니 여러분들은 믿고 잘 따라와 줘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불안한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한 리더의 책임감에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심은 ‘감정을 조율하는 리더’로서의 이미지를 강화시켰고, 이후 모든 판단의 무게가 B팀장에게 더 쏠리는 계기가 되었다.
회의 때마다 미묘한 정적이 생겼고,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감정이 선행하는 조직에서는 ‘‘의견’보다 ‘분위기’가 먼저 정리된다.
S대리는 입사 이후 Y과장과 오랜 시간 가까웠다. 그녀는 회사에 대한 불만과 리더에 대한 판단을 감정의 언어로 물려받았다.
겉으로는 밝고 상냥한 것 같았지만, 업무량이 많아지거나 일정이 밀리면 즉각적인 불만과 공격적인 태도로 일갈했다.
B팀장이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업무를 맡기면 그건 성장의 기회가 아니라 감정적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Q사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B팀장은 S대리를 믿고 맡길 수가 없었다. S대리는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편해했고, H사원이 파트 리딩을 맡게 되자 관계는 미묘하게 균열되었다.
H사원은 당시 신입이었지만, 경력직 사원처럼 일을 잘했다. 이전 직장의 대표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B팀장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 더 신경써서 세심하게 대응했지만 H사원에게 그 기억은 새 조직에서도 반복되었다.
H사원은 Q프로젝트 당시 B팀장의 피드백을 “이전 회사의 대표가 생각난다”라고 표현하며 자신이 다시 피해자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S대리와 H사원의 감정의 결이 비슷해진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건, Q사 프로젝트를 하기 전에는 곧잘 일 좀 한다는 H사원을 자기 팀원으로 만들고 싶어 탐내던 다른 팀장들이나 본부장들에게 H사원은 이렇게 곧잘 말하곤 했다.
“우리 팀장님은 제 롤모델이에요… 정말 멋있으시거든요.”
Q프로젝트에서 B팀장의 의도는 성장의 가이드였고, 정확하고 속도감 있는 판단력으로 빠른 수정 피드백이 필요했던 프로젝트 특성상의 구조적 피드백이 그녀에게는 감정적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S대리와 H사원, 이 두 사람은 A본부장에게 팀 이동을 요청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B팀장님은 일을 정말 잘하시기 때문에 업무적으로는 할 말은 없고요. 저는 팀장님과는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팀 이동하고 싶어요.”
구조가 책임을 회피할 때, 감정은 리더에게 전가된다
에이전시 업계에는 소위 ‘빡센 프로젝트'들이 있다. 매출은 높지만 리소스 투입이 많고, 클라이언트는 무척이나 까다롭고 일정은 불합리하다.
그중에서도 Q사 프로젝트는 악명이 높았다. Q사 클라이언트의 문화는 군대식에 가까웠고, 정확성과 속도, 제안의 양과 질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었다.
매년 다른 본부가 같은 프로젝트를 맡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팀원들의 감정적 반응과 팀 이동 요청, 그리고 반복되는 리더의 소진.
성과를 위해서는 팀이 성공해야 했다. 팀이 성공하려면 팀장이 버텨야 했다. 그러나 회사는 리더십을 지원하지 않았다.
B팀장에게 구조를 바꿀 권한은 주지 않으면서, 팀의 감정과 성과를 동시에 책임지라고 했다. 그렇게 감정의 무게는 위로부터 흘러내려 가장 아래의 리더에게 쌓였다.
B팀장은 감정의 완충장치가 되었고, 조직은 그 완충으로 버텼다. 하지만 그건 지속 가능한 리더십이 아니다.
구조가 감정을 조정하지 못하면, 리더는 감정을 대신 짊어진다. 그리고 리더가 지쳐버리면, 남는 건 감정뿐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Y과장의 감정적 대응과 퇴사, S대리와 H사원의 감정적 불만과 호소로 이어진 팀 이동 요청에 대해 A본부장은 팀원들의 이야기만 들었을 뿐, B팀장의 입장은 단 한 번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A본부장은 상황을 경영진에게 그대로 보고했지만, 그 과정에서 팩트체크는 없었다. 결국 B팀장은 구조적으로 소외되었고,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동력을 잃었다.
이건 단순히 한 본부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감정을 통해 리더를 평가하는 시스템으로 변질된 결과다.
리더십이 감정에 의해 정의되고, 팩트보다 감정이 더 빠르게 전달되는 조직에서는 어떤 리더도 오래 버티기 어렵다.
감정이 리더십을 대체할 때 일어나는 일
감정으로 순간의 리더십은 유지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감정은 지속적인 리더십의 언어가 될 수 없다.
감정이 판단을 대신하는 순간, 조직은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 끌려간다. 책임은 더 이상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리더는 감정을 관리하고, 본부장은 감정을 회피하며, 조직은 감정을 기준으로 프레임을 씌우거나 판단한다. 그 구조 속에서 성장하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잘 다루는 사람이 된다.
결국 감정으로 움직이는 조직은 리더십을 잃고, 판단력을 잃고, 조직의 방향까지 잃는다.
감정을 이해하는 리더는 필요하지만, 감정으로 리더십을 대신하는 조직은 스스로 붕괴의 길을 선택한 셈이다. 이건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다.
나는 감정 중심의 문화는 결국 유능한 리더를 고립시키고, 조직 전체를 병들게 하는 것을 보았다. 감정이 구조를 지배하는 순간, 조직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오히려 가라앉는다.
그건 어떻게 보면 리더의 실패가 아니라, 리더십이 설 자리를 잃어버린 구조의 실패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