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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윤 Nov 03. 2019

쉽게 우스워지는

하지만 결코 우습지 않은

모르는 남자에게 머리를 맞았다. 퍽 하고 맞은 건 아니고 꾹 하고 눌려 밀려났는데, 밀린 부분이 관자놀이쪽이었으므로 목이 왼쪽으로 꺾이며 몸도 동시에 휘청였다. 친구와 둘이서 90년대부터 2010년대 초반 히트곡을 틀어주는 술집에 갔다가 생긴 일이었다. 중앙 스테이지 한 켠에서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들과 함께 롤리폴리에 맞춰 함께 허슬을 현란한 듯 어설프게 추거나, 가시를 목청 높여 부르며 놀고 있었다. 떼로 모여 둥그렇게 서서 춤을 추다 보면 종종 무리 바깥으로부터 추근거리는 남자가 다가오는데, 추근거림의 현장을 목격한 (혹은 보통 '쟤 좀 이상하게 다가오는데?'하고 촉이 오기 때문에 미리 직감한) 무리 안의 누군가가 추근거림의 대상이 된 (혹은 될) 이를 무리 안쪽으로 끌어 당겨 그 남자가 접촉하지 못하도록 차단해준다. 두세 명이서 놀러온 여자들이 서너 무리 합쳐져서 둥글게 모여 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럿이서 놀면 더 재밌어서 처음 보는 여자애들끼리 10년은 알고 지낸 것처럼 같이 놀게 되는 것도 맞지만, 떼로 모여 서로를 보호해주기 위한 목적도 분명 있는 것이다. 여럿이서 놀게 되는 순간부터 둘이서 놀 때보다 더 큰 안전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친구는 주량을 한껏 넘겨 마신 상태였으므로 춤을 추다가도 가끔 몸을 가누지 못하며 삐걱이고 있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빠르게 다가오며 친구를 안으려고 하기에 '아, 또 저런 새끼가..'하며 손을 뻗어 막았다. 건조한 태도로 친 일종의 결계 같은 것이었다. 한 번 놀러갔을 때 결계는 수십 번도 넘게 치게 되니까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 순간 그 남자에게 머리를 맞은 것이다. 왼쪽으로 두 발짝쯤 밀려나면서 '어? 이게 뭐지?' 싶었다. 치근거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므로 대상에게 거절 당하거나 대상 옆의 누군가로부터 방해를 받으면 쉽게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이 보통의 케이스인데, 이렇게 강력하게 그것도 물리적으로 반발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당황도 잠시, 온 몸이 마른 장작이라도 된 것처럼 화가 화르륵 타올라서 금방 머리 꼭대기까지 올랐다. 어떤 새끼야, 하고 남자 쪽을 쳐다봤다. 남자는 자신의 일행들과 함께 나를 바라보며 비웃음 짓고 있었다. 업신여기는 눈빛과 깔보는 입꼬리. 번-쩍, 번-쩍 깜빡이는 조명 탓에 그 장면이 프레임 단위로 끊겨 보였다. 찰-칵, 찰-칵 하고 장면마다 찍힌 사진들이 내 마음의 바닥으로 떨어져 쌓일 때마다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 마디로 기분이 더러웠다는 얘기다. 몸도 머리도 굳어 버렸고, 불빛이 몇 번 더 깜빡인 뒤 정신을 차렸을 때 남자와 일행은 사라진 다음이었다. 이런 모멸감이 낯설지가 않아서 언제였더라 한참을 생각하기는 무슨, 떠올리려고 하자마자 생각났다. 노엘 사건. 그때는 모르는 남자가 아니라 아는 남자였다.


스무 살이 며칠 남지 않은 겨울이었다. 당시 학과에서 지원해주는 기숙사는 1년만 사용 가능했으므로, 1학년 내내 학과 기숙사에서 살았던 나와 대부분의 동기들은 2학기가 끝나면서 기숙사에서 나가야만 했다. 정해진 퇴거일이 다가왔고 기숙사에서 잘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함께 집을 공유했던 다른 이들은 일찍이 살 곳을 찾아 떠난 상태라 우리 집에는 오직 나와 룸메만 남아 다음 날 일찍 예정된 이사를 기다리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어디서 괴성에 가까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콘크리트 벽을 뚫고 들어오던 "노오에엘 노오엘!" 그땐 크리스마스가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대학가에 살다 보면 늦은 밤 다양한 고성방가가 난무하지만 금방 잦아드니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있는데 이놈의 노엘은 도무지 끝나지 않았다. 몇절까지 할 생각이지, 지금 서기 2012년이니까 2012년의 세월만큼 2012절까지 부를 작정인가, 싶었다.


한참을 듣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범인을 찾으러 내려갔다. 계단을 얼마 내려가지 않아 바로 찾았다. 같은 기숙사 2층, 남자 동기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기숙사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자기들끼리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해서 고래고래 노엘을 부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문을 두드렸다. 나올 때까지 여러 번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방음이 한꺼풀 벗겨진 노엘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나마 덜 취한 동기가 나왔길래, 친구들끼리 기숙사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노래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다고,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이사를 해야하니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알겠다, 미안하다, 말하는 그의 등 뒤로 눈이 풀린 노엘 가창자가 보였다. 그때도 얕잡아보는 눈빛과 멸시하는 입꼬리를 눈 앞에서 보았다. 속으로는 '저 새끼가..'하며 분이 끓어올랐지만, 대신 나와서 사과하고 있는 다른 동기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 그런데 닫자마자, 정말 닫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노엘을 부르는 게 아닌가. 문 너머에서 나를 목청껏 무시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동기들이 말렸는지 이윽고 조용해졌지만, 나는 모멸감에 몸이 굳어져서 집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한동안 그 문 앞에 서있었다.


그 정도로 그쳤길 천만다행인 걸까? 노엘을 부르던 동기와 몸싸움이 붙지 않아서, 술집에서 만난 남자로부터 전치 몇주짜리 상해를 입지 않아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결국 힘으로 붙으면 내가 질 거니까 알아서 기어야 하는 걸까? 까불지 말아야 하는 걸까? 까분다는 말은 건방지고 주제 넘게 군다는 의미인데, 대체 내가 어디서 까불었던 걸까? 정작 까분 사람은 남을 함부로 껴안으려고 하거나 오밤중에 두 개 층을 뚫고 올라올 만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 사람 아닌가? 권리를 침해 받지 않으려고 하거나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강인하든 상관없이, 나는 그들 앞에서 쉽게 우스워진다. 까딱하면 한 주먹 거리밖에 안되는 여자애라서 쉽게 만만해진다.


얼마 전 중고가구 거래 과정에서 판매자였던 여자가 구매예정자였던 남자에 의해 살해 당했는데, 가해자에게 살해의 이유를 물으니 "깎아달라고 말했는데 무시해서"라고 진술했단다. 깎아달라는 구매예정자의 요구를 매자는 거절할 권리가 있다. 구매예정자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그럼에도 그 가격에 구매하거나 혹은 구매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지 어떤 선택지에도 신체적 가해는 없다. 대체 까분 이는 누구인가? 쉽게 "네가 감히?"로 이어지는 자의식 과잉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약자들이 상해를 입거나 죽었을까? 그게 내가 아니라는 법이 있을까? 결국 다치거나 죽으면 내 손해라서 조심하며 살겠지만 움츠려들고 싶지 않다. 할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함으로써 무엇이 잘못된 건지 사람들과 함께 깨달아가는 것, 아무도 찾지 못하게 숨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의 몸과 나의 권리를 지킬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내가 조심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나는 쉽게 우스워지지만 결코 우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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