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윤 Oct 04. 2020

1년 전 퇴사했습니다

돌잔치 하듯이 써보는, 퇴사 이후 1년 동안의 소회

딱 1년 전이다. 커리어의 1교시를 끝내겠다는 호기로운 말과 함께 첫 직장에서 퇴사하고 꼬박 한 해가 흘렀다. 마치 서기 2020년처럼, A.T. (= After 퇴사) 1년이라고 새고 있다. 나의 작은 역사의 명확한 변곡점이니까. 1년 동안 3개월 단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1쿼터는 마냥 놀았다. 먹고사니즘은 내년의 나에게 맡기겠다며, 퇴직금을 탕진하고 (왜 그랬니...) 시간도 사치스럽게 썼다. 두피가 지르는 비명은 무시하고 탈색도 했고, 술도 바로 식도를 통해 위장에 꽂아 넣었다. 살이 오동통하게 올랐다. 혈중 콜레스트롤 수치가 아마 한창 회식할 때보다 높았을지 모른다.


2쿼터는 상당히 불안했다. 구인구직 사이트에서 검색을 누르는 순간부터 조졌다는 것을 느꼈다. 재취준, 한 달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세 달이 걸렸다. (이것도 빨랐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끝없이 의심하고 검증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잔고를 확인하며 돈을 쓰기 시작했다. 종종 망했다는 생각에 울었다.


3쿼터는 적응하느라 바빴다. 4년차가 아니라 0년차가 된 기분이었다. 익숙한 대기업의 속도와 문법은 완전히 버려야 했다. 모르는 게 많았는데 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 우선 호랑이 등에 올라타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어떻게든 부여 잡고 그 속도를 버텼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새로 익히느라 원래 잘했던 것마저 존못인 나 자신을 견뎌내야 했다.


4쿼터는 해보려고 애썼다. 적응했다고 스스로 느낀 순간부터는 잘하고 싶었다.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나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다. 결과를 내고 싶었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걸로. 아등바등 많은 일을 했다. 지쳐서 나가 떨어지기 싫어서 어떻게든 몸이 쉬는 시간은 확보를 했는데 머리는 쉬지 못했다. 성공한 부분도 실패한 부분도 있지만, '하면 는다'의 마법이 어김없이 통한 탓에 세 달 사이에 많이 늘었다고 느낀다. "일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기뻤다.




이번 추석, 예정에 없던 제사를 지내러 삼촌 집에 갔다가 친척 어른으로부터 "와 그 큰 회사를 그만 뒀노? 더 좋은데로 간 거재? 윤하는 똑똑하니까 능력껏 간 기재?"라는 말을 들었다. 추석을 핑계로 오랜만에 연락한 전 회사 동기가 "이직은 성공적?"이라고 물었다.


지난 1년은 성공적이었을까? 퇴사를 결정한 것에 전혀 후회가 없을까? 1%의 후회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대출 이율 앞에서 한 번 쯤은 후회할 수밖에 없다. 회사 규모에 기대어 받았던 달콤한 저이율,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퍼센테이지겠지.


하지만 미련은 없다. 그립지 않다. 퇴사를 결정하고 통보했을 때 아빠가 말했다. "오랫동안 지켜보이 니 인생은 우상향이더라. 니는 결국은 잘될끼다." 인생이 흘러가는 모양새를 그래프로 생각해봤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츰 위로 올라가는 것은 내가 매일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저 더 괴로운 곳에서 덜 괴로운 곳으로 내 인생을 피신시켜온 노력 덕분에 얻은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B.T.(=Before 퇴사)보다는 A.T. (=After 퇴사) 시대가 더 호시절이다. 덜 괴로우니까. 더 재밌고.


A.T. 1년보다 A.T. 2년은 과연 더 위에 있을까? 퇴사 이후의 삶도 꾸준히 우상향 할 수 있을까? 화들짝 놀랄만큼 기온이 뚝 떨어지는 가을의 어느날을 기점으로, 매년 현재의 좌표를 파악해야지. 삶을 잘 돌보고, 괴로움을 예의주시하고, 늦지 않게 덜 괴로운 지점으로 옮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지.

작가의 이전글 나는 종종 글레넬그 비치로 도망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