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봉리 May 26. 2023

신혼여행도 살아보는 거야

하와이 에어비앤비에서 만난 알로하 스피릿

남편이란 호칭이 아직은 어색한 새댁 두 달 차다. 1년 넘게 같이 살다가 결혼식을 올린지라 특별히 달라진 것도 없고, 그저 공동의 프로젝트를 하나 해치운 기분이다. 여러 계절을 함께 보내며 서로의 생활 습관이나 수면 패턴 등을 알아가고, 상대를 향한 애정과 다정함, 배려, 미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과 추억들이 쌓이며 '이 사람이라면 결혼이란 것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좋은 평생의 짝꿍과 함께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 동료들 앞에 서서 우리 잘 살겠노라 하고 선언하는 결혼식. 허례허식으로 점철된 결혼은 하지 말자 다짐하며 불필요하다 생각하는 것들은 뺐고, 대신 우리 부부가 중요히 여기는 것들을 더했다.


그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허니문이었다. 우리가 여행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기준이 있는데, 바로 '이제까지 서로 가보지 못했던 곳'이다. 남편도 해외 생활을 오랫동안 했었고 나도 경험이 많은 지라, 둘 다 가보지 않은 여행지를 함께 찾고 탐험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직장이 보수적인 산업군에 속해 있어 이제까지 같이 여행을 가도 3박 4일 정도가 제일 긴 휴가였더랬다. 여행을 미리 준비해도 주말이 껴있는 연휴다 보니 늘 비싼 항공권을 구입해야만 했고, 여행 후 일상에 복귀해 여독을 풀기에도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래서 허니문은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있어 긴 호흡의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빅 아일랜드의 쿠아베이로 향하던 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본 풍경. 우린 꽤 좋은 여행메이트다. 계획성과 즉흥성의 밸런스가 적절하고, 역할도 잘 분담된다. [사진 ©봉봉리]

그렇게 정한 허니문 기간은 13일. 여행지는 하와이. 전형적이지만 클래식하며, 둘 다 가본 적 없는 곳이다. 직항 항공권이 저렴한 편이길래 반년 전에 구입하고 나중이 되어서야 준비하며 깨달은 사실 하나. 바로 현지 물가는 결코 저렴한 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보다 4개월 먼저 결혼한 친구 승희가 하와이로 허니문을 다녀온 후 여러 정보들을 전수해 줬는데, 괜찮은 호텔들이 기본 1박에 120-150만 원 하는 사실에 놀랐다. 우린 12박을 머물러야 했으니 값비싼 호텔은 애당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남편도 나도 호텔보다는 로컬 하우스를 선호했다. 널찍하고 안락한 거실 공간과 요리를 할 수 있는 부엌이 분리되어 있고, 호스트의 취향과 그 지역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는 에어비앤비를 말이다.

호놀룰루 공항 벽면에 있던 하와이 제도의 모습 [사진 ©봉봉리]
내가 예약한 하와이 마우이와 빅 아일랜드의 에어비앤비들

하와이 제도는 하와이 섬으로 불리는 본섬인 빅 아일랜드(Island of Hawaiʻi), 마우이(Māui), 오아후(Oʻahu), 카우아이(Kauaʻi) 등 8개의 큰 섬과 129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2주일 동안 세 개의 섬을 가기로 결정하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3일의 여행 기간은 마우이에서 3박, 빅 아일랜드에서 6박, 그리고 가장 번화한 호놀룰루 시가 속한 오아후 섬에서 3박을 보내는 것으로 쪼개 나누었다. 마지막 여행지인 오아후섬에서는 와이키키 해변 앞에 있는 좋은 호텔을 예약했다. 아무래도 하와이 제도의 인구 중 절반이 넘게 사는 가장 번화한 관광 도시다 보니 호텔보다 좋은 에어비앤비나 렌탈하우스를 찾기 어려웠다. 대신, 마우이와 빅 아일랜드에서 열흘을 보낸 에어비앤비는 정말 그 어느 때보다 고심하고, 나의 집요한 서칭에 서칭이 더해져 찾은 곳들이다.


주변 지인들이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에어비앤비를 찾을 수 있냐고 종종 물어보곤 하는데, 나의 팁은 바로 '필터링'이다. 처음 서칭을 할 땐 필터 없이 한 번 훑어본 뒤 무선 인터넷, 세탁기, 오두막, 욕조, 수영장, 부엌, 주차 공간 등 내가 원하는 요소들을 필터를 걸어 또 찾아본다. 그러면 괜찮은 숙소가 몇 개 눈에 들어오는데, 그때 그 에어비앤비가 있는 동네를 구글 맵에 찍어 스트리트 뷰로 보곤 한다. 그럼 대충 그 동네와 집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여행을 가기도 전에 준비하는 그 시간부터 나의 여행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테니스장이 있는 마우이 키헤이의 콘도


우리 부부는 테니스를 좋아한다. 어디를 여행하든 라켓 한 자루씩 들고 떠난다. 하와이의 야자수 밑에서 치는 테니스는 우리에게 있어 로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멋진 테니스 코트가 있는 에어비앤비를 발견했으니, 당연히 예약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우이의 에어비앤비. 테니스장과 수영장이 딸린 고급 콘도였다. 바로 앞에 훌륭한 해변이 있기 때문에 수영장은 갈 일이 없었지만, 테니스장엔 열심히 들락거렸다. [사진 ©봉봉리]

마우이에 도착한 첫날엔 별 다른 계획이 없었고 그다지 피곤하지도 않았기에, 우린 자연스레 라켓을 들고 집 앞 테니스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바로 꿈꾸던 야자수 아래 멋진 하드코트였다. 테니스장 펜스를 타고 아름드리 내려 핀 꽃에서 향기가 진동을 했다. 기분 좋게 둘이 4세트 단식 게임을 하다 보니 금세 땀이 났다. 그럴 땐 집 앞에 있는 바다로 뛰어들면 그만이다. 천국이 따로 없다.

하와이를 여행하며 이틀에 한 번 꼴로 남편과 테니스를 쳤다. 7일 동안 테니스를 쳤으니 누군가가 승리를 했겠지? 그게 누구일까.. [사진 ©봉봉리]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매튜와 카일라니 가족이 운영하는 이 에어비앤비는 마우이 섬 남부의 중간 동네인 키헤이(Kihei)에 있다. 할레아칼라 산(Haleakalā) 정상에도 가고, 미리 한국에서부터 예약한 테니스 클럽이 있는 와일레아(Wailea)도 가고, 섬에서 가장 번화한 라하이나(Lahaina)에도 가기 제격인 동네였다. 게다가 카마올 비치 공원(Kamaole Beach Park)이 집 바로 앞에 있어 해 질 녘에 산책을 나가 노을 지는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매우 낭만적이었다.

마우이에서의 첫날 숙소 앞바다 산책. 다들 노을을 보나 싶었는데, 저 멀리 돌고래들이 점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와이에 왔음을 실감했다. [사진 ©봉봉리]
체크인앤아웃 방법부터 맛집, 마트 등의 로컬 추천까지 보석 같은 정보가 가득했던 에어비앤비 호스트 매튜의 온라인 가이드북. 체크인 일주일 전에 메시지로 보내주었다.

사실 이 에어비앤비에 가기 전부터 가장 기대됐던 건 테니스장도 테니스장이지만, 호스트인 매튜가 미리 보내주었던 동네 가이드였다. 이제까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수많은 에어비앤비를 경험해 봤지만, 이렇게 디테일하게 로컬 팁들을 전수해 주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체크인하는 방법, 쓰레기 버리는 방법 같은 콘도 이용 가이드부터 관광객들은 잘 모르는 조용한 해변, 호스트가 자주 가는 맛집, 심지어 마트까지 모든 정보들이 이 온라인 가이드북 안에 있었다. 매튜의 로컬 팁은 모두 100% 만족 그 이상이었다. 특히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그의 추천은 바로, 푸드랜드라는 대형마트 안에 있는 포케집이었다. 장을 보고 이곳에서 사 온 포케와 야채 등으로 집에서 차려 먹는 식사야 말로 최고의 한 끼였다.

없을 게 없던 콘도. 집에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하며 맥주 한 캔에 손수 해 먹는 식사야말로 우리에게 있어 최고의 시간이었다. [사진 ©봉봉리]
나흘 동안 우리 집이었던 마우이 키헤이의 에어비앤비. 호텔방이었으면 못 느낄 안락함이 있다. [사진 ©봉봉리]


호스트의 정원이 아름다운 코나의 단독주택


마우이에서 빅 아일랜드까지는 비행기로 30분이면 닿는다. 하와이 제도의 섬과 섬을 잇는 하와이안 항공은 마치 우리의 버스처럼 대중교통과 다름없어 보였다. 빅 아일랜드는 우리의 허니문 중 가장 많은 시간인 일주일을 할애한 섬이다. 하와이 본섬인 만큼 규모가 제일 크지만 덜 발달되어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대자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쪽으로는 코나(Kona)가, 동쪽으로는 힐로(Hilo)라는 주된 도시가 자리 잡고 있는데, 워낙 섬이 크다 보니 두 도시 간 기후도 확연히 다르다. 특히 힐로는 비의 도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하루에 한 번은 꼭 비가 왔다. 코나와 힐로 모두 공항이 있기에 우리는 일주일 동안 코나 인 힐로 아웃으로 동선을 짰다.

빅 아일랜드에선 어느 해변을 가든 쓰레기 하나 볼 수 없었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감사함으로 누리던 사람들이 인상적이었다. 사진은 코나의 마니니오왈리 해변 [사진 ©봉봉리]

빅 아일랜드에서의 첫 숙소는 코나 공항과 다운타운 중간에 자리한 주거 단지의 단독주택이었다. 호스트인 잭과 조이스 부부가 본인들이 사는 집의 별채 하나를 내어준 곳인데, 셀프 액세스 방법을 미리 알려주던 하와이의 다른 호스트들과는 달리 조이스는 우리가 오는 시간에 맞춰 직접 마중을 나왔다. 그리고 본인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집 구석구석 하나하나 애정을 담아 소개해주었다. 놀랍게도 냉장고 안은 먹을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모두 다 우리를 위해 준비한 것이니 맘껏 먹으라는 친절한 말도 해주셨다. 거기에 초콜릿과 샴페인까지!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하고, 집을 소개받고, 음식까지 받으니 마치 오랜 친구의 집에 놀러 온 기분이 들었다. 이게 바로 에어비앤비의 매력 아닐까.

에어비앤비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조이스가 가꾸는 정글 같은 정원이 펼쳐진다. [사진 ©봉봉리]
(왼)이 에어비앤비의 공동호스트인 반려묘, 겟어웨이! 늘 조이스의 정원에서 졸고 있다. (오)모든 종류의 원두캡슐과 차들이 준비되어 있다. [사진 ©봉봉리]

우리가 갔던 하와이의 모든 에어비앤비에는 호텔과는 달리 스노클링 장비와 비치 체어, 비치 타월 등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특히 코나의 잭&조이스의 집에 사흘간 머물렀을 때는 차 트렁크에 비치 체어와 타월 등을 싣고 다니며 드라이브하다가 멋진 해변이 나오면 어디서든 자리를 펴고 낮잠을 자거나 헤엄을 치곤 했다. 코나에 도착한 첫날에는 마니니오왈리 해변(Manini'owali Beach)에 갔다가 우크라이나에서 아내와 장모장인을 모시고 여행 온 데이비드를 만났는데, 우리의 일정을 물어보고는 꼭 마우나케아 해변(Mauna Kea Beach)에 갈 것을 추천했다. 그것도 새벽같이 일어나 가라는 것 아닌가. 한 리조트의 깊숙이 자리한 숨은 보석과도 같은 해변인데, 주차가 최대 30대만 수용 가능한지라 무조건 일찍 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갔던 하와이의 모든 에어비앤비에 구비되어 있던 비치 체어. 저렇게 등에 메고 다니다 좋은 자리가 있으면 펴고 앉아 바다도 보고,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사진 ©봉봉리]

하와이의 해변은 법적으로 모두에게 무료로 개방(Public Access)된다. 아무리 값비싼 호텔 앞에 있는 해변이라도 누구나 해변에 들어갈 수 있다. 대신 환경 보호 차원에서 일일 입장객 제한을 두는 곳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갔던 마우나케아 해변의 경우 한정된 주차 공간 때문도 있겠지만, 그렇게 제한을 두고 관리를 하기 때문에 해변이 붐비지 않고 자연도 더 훼손되지 않았으리라. 무료는 아니지만 오아후 섬의 하나우마 베이(Hanauma Bay)와 마우이 섬의 할레아칼라 국립공원(Haleakala National Park)도 일일 입장객 제한을 두는데, 이 입장 신청이 수강신청만큼 어렵다. 우리가 갔던 할레아칼라 산의 경우 한 달 전 예약을 할 수 있고, 하루에 딱 100대의 차량만 받는다. 그리고 입장비도 한 차량 당 30달러로 결코 저렴하지 않다. 관광객들로 훼손된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관리하는데 그만큼의 리소스가 드는 것이다. 하지만 훼손된 자연이 다시 온전히 회복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대자연에 대한 감사함으로 마치 우리가 있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하게 누리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 아닐까.

빅 아일랜드의 숨은 보석과도 같은 마우나케아 해변.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거북이! 하와이를 여행하며 정말 거북이들을 많이 만났다. [사진 ©봉봉리]


쏟아지는 별을 보며 목욕할 수 있는 나알레후의 돔 글램핑


이제는 빅 아일랜드의 남쪽으로 향할 차례다. 코나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나타났다. 길을 가다가 서고 가다 서고를 반복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자연의 모습도 제각기 다르다.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처럼. 우리의 세 번째 에어비앤비는 바로 빅 아일랜드 남쪽에 자리한 나알레후(Naalehu)라는 작은 동네에 있었는데, 가는 길목에 점심식사와 간식을 먹기 위해 잠시 멈춘 파호에호에 공원(Pāhoehoe Beach Park)과 페블스 비치(Pebbles Beach)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스팟이었다. 특히 페블스 비치는 다른 해변과는 달리 까만 몽돌들이 깔려있어 파도가 오갈 때마다 돌 구르는 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줬다. 

남쪽으로 향하던 길에 발견한 최고의 런치스팟. 다포케쉑(Da Poke Shack)의 포케를 테이크아웃해서 먹었다. [사진 ©봉봉리]

빅 아일랜드의 남서쪽 일대는 코나 커피 벨트이기도 하다. 아무 커피 농장에 들러도 맛있는 커피를 시음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린웰 농장(Greenwell Farms)에 들러 투어를 했는데, 원두뿐만 아니라 바나나, 파인애플, 후추 등 이 섬 일대에서 재배하는 작물들을 보고 만지고 맛볼 수 있었다. 1시간 넘게 정성 가득한 가이드를 받다 보면 자연스레 하와이안 커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생기고, 이곳 농장에서 생산한 원두도 사지 않을 수가 없다. 코나에서 생산된 원두 10%만 블렌드 되어 있어도 '코나 커피'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한다. 하와이의 어느 마트를 가건 다양한 원두들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파는 커피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코나 원두가 어느 정도 섞여 있는지, 어떤 게 100% 코나 원두인지 알 수 있다. 100% 코나 원두는 훌륭한 기념품이 되기도 한다.

커피 외에도 후추, 파인애플, 바나나 등의 작물들을 재배하던 그린웰 농장. 바나나는 바로 따서 먹기도 했는데, 정말 달콤했다! [사진 ©봉봉리]

커피 벨트 바로 근처에 있는 캡틴 쿡(Captain Cook)이란 동네는 하와이를 비롯한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탐험했던 제임스 쿡 선장을 기리며 이름이 붙은 곳인데, 이곳의 마니니 비치(Manini Beach)는 우리 부부가 하와이에서 가장 사랑하는 해변이 되고야 말았다. 스노클링을 하며 가장 많은 물고기들을 만날 수 있고, 백 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거북이도 쉬어가는 해변이다. 해변이 있는 나푸푸 공원(Nāpo'opo'o Park) 입구에서 한 할머니가 자연 보존을 위한 암묵적인 그라운드 룰에 대해 설명도 해주셨는데, 하와이안 스피릿이 전해져 신성한 느낌마저 들었다.

캡틴 쿡의 마니니 비치에서 만난 거북이 할아버지. 돌고래도 자주 헤엄치는 곳이라 유영하는 돌고래들로부터 일정 간격 떨어져 있으라는 표지판도 보였다. [사진 ©봉봉리]

많은 곳들에 정차하다 보니 예상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에어비앤비. 숙소가 있는 사유지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았다. 계속 들어가다 보니 드넓은 자연 안에 숨겨져 있던 돔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침구부터 욕실, 키친까지 다 갖춰져 있는 걸 떠나 굉장히 럭셔리한 글램핑 사이트였다. 내가 이곳에 머물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야외에 있는 욕조 때문이었는데, 약간 쌀쌀한 공기 속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가시는 것 같다. 다만, 우리가 갔을 때 비가 내리고 전기도 자꾸만 끊겨 바깥의 부엌에서 요리를 해 먹진 못한 게 아쉬움이 남았다. 전기도 신통찮고 휴대전화도 되지 않으니, 오히려 서로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긍정의 힘..)

드넓은 프라이빗 부지에 숨겨져 있는 돔 형태의 에어비앤비 [사진 ©봉봉리]
자연 속에서 즐기는 목욕. 남편이 발뒷꿈치 각질 제거해준다고 페블스 비치에서 돌멩이를 주워왔다. 이것이 사랑인가보다.. [사진 ©봉봉리]
안락한 돔 내부를 파노라마로 찍어보았다. 돔 바깥에 욕실과 키친이 있는데, 벌레는 많았지만(..) 매우 낭만적이었다. [사진 ©봉봉리]


살아 숨 쉬는 화산이 느껴지는 부티크 코티지


빅 아일랜드는 지금도 활발하게 살아 숨 쉬는,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활화산이 있는 섬이다. 하와이 화산 국립공원 바로 부근에 볼케이노 빌리지(Volcano Village)가 있는데, 이곳에서 사흘간 머문 에어비앤비는 우리에게 있어 단연 최고의 숙소였다. 0.5 에이커(무려 612평..) 규모의 우거진 숲으로 둘러싸인 단독주택으로, 사유지에 들어서는 순간 남편과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우린 오직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이 집에서 온전히 시간을 보내기로.

사흘 동안 우리 집이었던, 600여 평의 원시림 안에 숨겨져 있는 코티지 [사진 ©봉봉리]

밥을 해 먹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보고, 야외 데크에 있는 뜨거운 월풀에 몸을 담그고, 세탁기를 돌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고, 벽난로 앞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고,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듣고, 나무 욕조에 아로마 오일을 풀어 목욕도 하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엽서를 쓰고, 집 앞마당에 출현한 장기와 까투리도 넋 놓고 구경하고.. 우리는 이 집을 후회가 없도록 온전히 누렸다.

그저 머물기만 해도 좋았던 볼케이노 에어비앤비 [사진 ©봉봉리]

하루 중 유일한 외출은 동네의 푸드트럭에 갔을 때였다. 괜찮은 식당이나 마트가 많지 않은 볼케이노 빌리지엔 푸드트럭이 그래도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태국 음식을 팔았던 툭툭 타이 푸드트럭(Tuk-Tuk Thai Food Truck)은 우리가 너무 사랑해서 두 번이나 갔더랬다. 음식이 정말 맛있어서 주문을 하면 30분에서 한 시간까지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많다. 이곳의 팟타이와 그린커리를 픽업해 와 집에서 먹는 식사 시간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었다.

밥을 해먹고, 목욕을 하고, 벽난로 앞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사진 ©봉봉리]

둘째 날엔 이왕 볼케이노 빌리지에 왔으니 화산 지대를 가보자 하여 해 질 녘에 진행되는 2시간짜리 에어비앤비 체험을 즉흥적으로 신청했다. 볼케이노 국립공원 주차장에서 만난 에어비앤비 체험 호스트인 던은 좋은 에너지가 전해지는 미국인이었는데, 하와이안 문화에 흠뻑 빠져 이주해 온 로컬 가이드였다. 그녀는 킬라우에아(Kīlauea) 화산 지대까지 우리와 함께 하이킹하며 하와이 신화와 화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장 최근인 작년 11월엔 마우나 로아(Mauna Loa) 화산이 38년 만에 분화를 시작해 붉은 용암이 분출되기도 했었는데, 그때 던이 직접 찍은 사진들도 보여줬다. 킬라우에아에서는 용암을 볼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가스가 나오고 있었다. 살아 있는 대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경외심이 들었다. 하와이 신화에 등장하는 마담 펠레(Madam Pele)는 킬라우에아를 관장하는 화산과 불의 여신이다. 언제 마담 펠레가 깨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마담 펠레가 잠들어 있는 킬라우에아 화산. 에어비앤비 체험 호스트인 던은 우리를 화산 지대로 안내하며 하와이 신화와 이제까지의 화산 활동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사진 ©봉봉리]


대자연이 곧 내 집이 되는 키아우의 오두막


아쉽지만 볼케이노 빌리지를 뒤로 하고 이제 빅 아일랜드의 마지막 에어비앤비로 향하는 길. 힐로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아후 섬으로 떠나야 했기에, 힐로 옆동네인 키아우(Keaau)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케빈과 레이첼 부부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작가다. 그들의 땅은 정글처럼 우거지고 매우 커서, 그들이 직접 그린 약도를 보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우리가 머무는 별채에서 한참 걸어야 키친이 나왔고, 또 한참 걸어야 수영장이 나왔고, 또 한참 걸어야 그들이 살고 있는 본채가 나왔다. (이 작가 부부는 어떻게 이 거대한 대지를 소유하고 있는 걸까 매우 궁금했다..)

바닷물이 아닌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 건 이곳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우거진 정글 속에서 수영을 하는 것도 물론 좋았다. [사진 ©봉봉리]

이 동네는 비는 많이 오긴 하지만, 기온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 흔한 에어컨도 없고, 심지어 창문도 없었다. 모기 어택을 막아줄 방충망이 다였는데, 덕분에 밤에는 개구리 울음 소리가, 아침에는 닭 우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이곳은 내가 가본 에어비앤비 중 가장 자연친화적이기도 했다. 주방뿐만 아니라, 변기와 샤워가 모두 야외에 있었으니 말이다. 대자연 속에서 벌거벗고 샤워하는 경험은 작은 해방감을 맛보게 해 주었다.

자연친화적이었던 키아우의 오두막. 샤워할 때 약간의 가림막 역할을 해주는 거대한 몬스테라 이파리는 한국으로 가져가고 싶을 정도로 수형이 굉장히 예뻤다. [사진 ©봉봉리]
한참 걸어야 나오는 야외 부엌. 캠핑 야영장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많이 좋아했던 푸드랜드 마트에서 사온 재료를 가지고 밥을 해먹었다. [사진 ©봉봉리]

힐로 다운타운은 코나보다 더 읍내 같은 느낌이다. 힐로 파머스 마켓(Hilo Farmer's Market) 주변으로 상권이 몰려 있는데, 여기도 조금만 걸어 다니다 보면 다 훑어볼 수 있다. 다운타운을 조금만 벗어나도 개발이 되지 않은 원시림의 모습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아카카 폭포(Akaka Falls State Park)로 향하던 길목에선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온 것처럼 우거진 원시림이 계속해서 펼쳐졌는데, 군데군데 갈라져 있는 아스팔트 도로만이 인간이 살고 있는 행성임을 짐작케 하는 듯했다.

작고 정겨운 도시 힐로. 헤드 부분에 하와이섬이 각인된 마호가니 원목의 우쿨렐레를 샀다. 아버지와 함께 하와이안 우쿨렐레를 만든다는 도미닉이 직접 연주도 해줬다. [사진 ©봉봉리]
아카카 폭포로 향하던 길에 잠시 정차하고 큰 숨을 내쉬었던 원시림. 빅 아일랜드에선 사람 손이 타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사진 ©봉봉리]

드라이브를 하다가 마음에 드는 해변이 있으면 차를 세우고 바다에 뛰어들거나, 혹은 테이크아웃해온 음식을 먹거나, 아니면 석양을 바라보거나. 이렇게 감사한 마우이와 빅 아일랜드에서의 열흘이 지났다. 이후에 떠난 마지막 섬인 오아후는 확실히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하와이의 모습과는 달리 매우 상업적으로 번화한 도시였다. 하지만 와이키키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우리가 마우이와 빅 아일랜드에서 봤던 사람 손이 덜 탄 웅장한 대자연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결혼 10주년 때 하와이에 다시 오자 했는데, 그때는 가보지 못했던 카우아이 섬에 가보리!

고층 빌딩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호놀룰루의 와이키키 해변(Waikīkī Beach) [사진 ©봉봉리]





하와이를 여행하다 보면 표지판이나 식당 등에서 하와이 토착민의 언어를 매일 보고 들을 수 있다. 하와이어는 A E I O U H K L M N P W 이렇게 12개의 알파벳만 사용하는데, 음절이 모두 모음으로 끝나는 개음절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받침소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하와이어를 읽을 때 뭔가 굉장히 귀엽고 기분이 좋아진다. '안녕하세요'란 인사의 의미가 담긴 알로하(Aloha), '감사합니다'는 마할로(Mahalo), '가족'은 오하나(Ohana), '어린이'는 케이키(Keiki)라 부른다. 우리가 좋아한 하와이어 중 하나는 바로 마나(Mana)였는데, 에너지를 뜻한다. 화산 폭발로 인해 죽지만 곧 다시 살아나는 강한 생명력을 하와이를 여행하며 느낄 수 있었다.

바다로 흘러 들어간 용암이 굳어 생긴 대지 면적은 매년 평균 5만여 평. 화산활동으로 어디든 까맣던 본섬의 남쪽에선 강한 생명력 마나(Mana)를 느낄 수 있었다. [사진 ©봉봉리

특히 알로하(Aloha)라는 단어에는 인사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친절(Akahai), 조화(Lokahi), 기쁨(Olu’olu), 겸손(Ha’aha’a), 인내(Ahonui)를 내포한 하와이어의 머리글자를 본떠 만든 조어로, 하와이 스피릿을 나타낸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든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에어비앤비에서 지낼 때에도, 호스트를 만날 때에도,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할 때에도, 해변에서 만난 여행자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알로하 스피릿은 언제 어디서나 전해졌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때 하와이에서 배우고 느낀 따뜻한 마음들을 잊지 말고, 하와이안처럼 살아가리.

(왼)호놀룰루의 파타고니아에서 만난 알로하 스피릿에 대한 설명. 파타고니아란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와 닮아 있다. (오)힐로 공항 화장실 표지판에 쓰인 하와이어 [사진 ©봉봉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