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산 게이의 <헝거>
배가 고프다. 먹는다. 배가 부르다.
뭔가가 고프다. 읽고 보고 산다. 또는 읽고 보기 위해 산다. 부르지 않다. 그게 뭐건 간에.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삼켜 이렇게까지 몸집을 불려 왔다. 작년 이맘때쯤 빨개벗고 다닌 것도 아닌데, 올해 입을 옷이 없다. 핸드폰 터치 몇 번으로 간단하게 돈을 쓴다. 내게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샀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언제나 내 것이었을 것 같은, 크게 새롭지 않은 옷과 신발과 장신구와 화장품을. 새로워지는 것은 진짜 나라기보다 내 기분일 뿐이다. 며칠이 지나면 기분은 다시 돌아온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정신에는 군살이 붙었다. 그렇게 점점 불필요하게 정신이 비대해진다. 자극의 역치는 점점 올라가고,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노정태가 <탄탈로스의 신화>에서 역설한대로, 우리에게는 다시 떨어질 돌이라도 굴려올리는 시지프스의 근육통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배가 고파 사과를 따려고 하면 사과가 도망가고 허리를 굽혀 물을 마시려고 하면 물이 도망가는 저주를 받은 탄탈로스다. 영원히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
록산 게이의 말은 훨씬 쉽다.
아, 우리는 얼마나 원하는가.
우리는 허기로 가득하다.(p.273)
록산 게이의 <헝거>는 끝나지 않는 허기로 인해 '병적으로 비만인' 상태가 되어버린 유명 작가의 절절한 자기 고백이다. 허기의 발단에 집단 성폭행이라는 비극이 있었다. 그녀는 작고 약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고, 성적으로 매력적인 대상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몸을 불리자. 먹자. 먹는 순간에는 트라우마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다 잊을 수 있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록산이 이렇게 커다란 사람이 된 건 그녀 잘못이 아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록산은 자신을 탓했다. 모든 것이 자존감의 문제였다. 록산이 자신을 벌 주는 방법은 그녀를 더욱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음식을 향한 끝이 없는 갈망은 곧 건강을 위협했고, 너무 커져버린 몸에 대한 사회의 냉정한 시선은 그녀의 자존감을 약화시키기만 했다. 록산의 자기혐오는 너무도 깊고 오래 묵은 탓에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글쓰기라는 좋은 도구가 있었다. <헝거>라는 책은 록산이 글쓰기를 통해 용기 있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치유를 행하는 과정을 기록한 결과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추천사처럼, '글쓰기의 모범이란 이런 것이다'. 은유 작가가 <쓰기의 말들>에서 증명하듯, 어떤 이에게는 고난을 견디어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글쓰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는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가하는 자존감 바닥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동력으로 삼는 인간의 욕망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미디어다. 모든 것의 매출 증대에 봉사하는 광고는 탄탈로스의 사과처럼 잡을 수도 없는 '좋은 것'을 설정해두고 왜 잡지 못하느냐며 모든 이를 질책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 인간은 스스로가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끼는 인간이다. 나는 저 사람처럼 부자가 아니니까. 나는 저 사람처럼 예쁘지 않으니까. 나는 저 사람처럼 똑똑하지 않으니까. 내가 저렇게 되면 행복하겠지. 치아를 교정해야겠어. 피부 미백을 돕는 화장품을 써야겠어. 종아리 알을 빼주는 크림을 써야지. 더 청순해보이는 화장법을 배워야겠어. 머리결이 좋아보이는 마법의 크림을 써야겠어. 더 날씬해보이는 바지를 사야겠어. 하지만 우리 모두는 내가 바라던 그 상태에 도달해도 도달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내가 상상했던 행복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록산도 안다. 그녀가 날씬해져도 완전하게 행복한 삶이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나의 몸이 어딜 가든 조롱 혹은 걱정의 대상이 되고 내가 뭘 하든 '뚱뚱한 사람이니까' 혹은 '뚱뚱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라는 식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계속 울부짖는다.
그리고 나도 알고 있다. 록산이 나처럼 평균적인 체형을 갖게 되더라도 여성인 이상 결코 몸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딸로 태어났기에 나는 10살이 되기 전부터 체형과 몸가짐에 대한 제재를 받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점점 통통해지자 학교 남자애들은 물론 아빠까지 항상 공공연하게 나를 놀려댔고, 중학교에 들어가 교복을 입자 '무다리'라는 별명이 따라왔다. 속상해하는 나에게 엄마는 '걔들이 널 좋아해서 그런다' '예민하게 남들 하는 얘기를 왜 다 신경쓰냐'고 나를 탓했다. 흔한 얘기다.
중학생 시절 SES나 핑클 같은 아이돌 가수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연예계는 우리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모든 '좋은 것'의 상징이 되었다. 나는 TV 속의 그들과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두 달만에 그토록 원하던 40kg 대에 진입했다. 엄마도 '마르니까 예쁘다'는 평가를 했다. 그리고 일주일 째 변을 보지 못해 병원에 갔다가 의사에게 한 소리를 듣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겨우 14살 때였다.
10대, 20대를 지나오면서 'body shame(체중이나 체형 등을 근거로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주는 행위)'을 셀 수도 없이 당했고, 반대로 다이어트에 성공했을 때 불필요한 찬사를 들으면서 살았다. 아직까지도 나는 살이 좀 찐 것 같다, 살 좀 빼야할 것 같다, 빠진 것 같다, 예뻐졌다, 화장 좀 하고 다녀라, 몸매가 좋아졌다, 연예인처럼 얼굴이 작다, 다리가 길다, 허리가 잘록하다, 발목이 가늘다 등등 끝없이 서로를 평가하고 평가당하는 사회에서 산다. 홈트레이닝 세계에 입문하면서 한국 비디오에는 '연예인 OOO 같은 어깨 만드는 운동' 'OOO 같은 잘록 허리 만드는 운동' 같은 키워드밖에 찾을 수가 없어서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고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할 수 있다'는 외국 비디오로 갈아탔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로 페미니즘에 관심이 생기고 마침 아기를 낳게 되면서, 나는 나름대로 스스로 '개안'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헝거>를 읽으면서는 내가 아직까지 얼마나 남성의 시각을 차용해서 스스로를 대상화하면서 외양이나 행동을 검열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수용될 만한 적절한 외모, 옷차림, 머리 모양, 말투. 30년에 걸친 자기 대상화가 진짜 나에게 어울리는 모습을 가리거나 변형시키면서, 가부장제에 순응하기도 하고 격하게 반항하기도 하는 복잡다단한 형태로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것이다. 이를 테면 나의 스모키 화장은 결코 '청순'해보이고 싶지 않은 반항적 행동인 동시에, 눈매를 더 또렷하고 크게 만들어 일반적 미의 기준에 부합하고자 하는 순응적 행동이다. 내가 정기적으로 운동하는 건 건강을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거울을 보면 TV 속 그녀들 같지 않은 허리와 다리가 아쉽다. 페미니스트인 우리는 공고하게 다져져 온 남성 중심적 문화와 타협하거나 이를 깨부수려 매 순간 나 자신과 싸운다. 어느 경우에도 기준은 남성에게 있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록산 게이처럼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발언해야만 한다. 그 지점에서 이렇게 이름 있는 작가의 용기 있는 고백은 유의미하고 소중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헝거>가 정말 개인적인 성격이 강한 이야기에 머물고, 그렇기에 에고 트립에 가까운 글쓰기의 결과라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지나 단순히 음식을 향한 갈증이 아닌 현대인의 정신적 허기를 고찰하는 사유적 면모를 보여주기를 기대했었다. 록산 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케이스를 소개한다거나, 미디어 비평을 적극적으로 한다거나 하는 내용적 풍성함을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언제나 자신의 약한 자존감이나 무례한 사회와 싸워갈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기 전과 읽고 난 후 큰 체형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