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건네받았다

아버지가 보낸 것은 사진파일이 아니라, 한 세대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by 루츠



며칠 전, 아버지에게서 파일 몇 개를 받았다.


사진1.zip, 사진2.zip, 사진3.zip,
아버지의 앨범.zip, 어머니 앨범.zip.


압축파일 몇 개가 아니라,
거의 한 세대의 시간이 통째로 내게 온 것 같았다.

그건 사진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결혼을 하고 호주로 떠나기 전,
부모님 집에 들러 며칠을 함께 보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커다란 가족앨범에서
내가 나온 사진들만 골라
작은 앨범 하나를 만들었다.

내 사진만 따로 모아 가져온 것이다.

그 앨범은 지금도 내게 있다.
지금 브런치에 올리고 있는 사진들도
대부분 거기서 꺼낸 것들이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 앨범을 꺼내보다가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정작 부모님 사진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늘 사진을 찍어주던 쪽은 부모님이었으니까.

내가 기억하고 간 것은 ‘나’였고,
그 기억 바깥에서 나를 남겨준 사람들의 시간은
빠져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가족사진이 보고 싶다고,
혹시 몇 장만 보내주실 수 있냐고.

그런데 아버지는 몇 장을 보내주신 게 아니었다.

며칠 뒤 도착한 건
압축파일 몇 개였다.

그 안에는
아버지의 할머니,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어머니,
형제들, 사촌들,
시골 장날의 풍경까지 들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사진기가 흔하지 않았을 텐데,
그 한 장 한 장이 가진 무게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 크게 다가온 건
아버지가 그 사진들을
직접 한 장씩 스캔하셨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사라진 시간을 다시 살려내는 일이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줄 알았던 얼굴들을
다시 꺼내
내게 건네주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걸 보내시며


“보물창고다”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그랬다.

그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애초에 돈이라는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어린 시절 앨범까지
모두 보관하고 계셨고,
그것까지 스캔해 보내주셨다.


엄마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 연애하던 시절까지.

그 사진들을 보는 건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중학생 시절의 아버지 얼굴에서
지금의 내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닮았는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시골 장날 사진 속 어린 아버지를 바라보는 기분은
도무지 내가 아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엄마의 사진들은 또 다른 쪽에서 나를 흔들었다.

엄마는 늘 ‘엄마’로만 존재했던 사람인데,
그 사진 속에는
누군가의 딸이었고, 학생이었고,
한 사람의 젊은 여자가 있었다.

나는 부모님을
부모 이전의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그때 느낀 감정은 묘했다.

반갑고,

벅차고,

애틋하고,
이상하고,
조금은 무섭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그 사진들은
단순한 옛날 사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흘러가버린 줄 알았던 시간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였고,

그 시간이 지금 내 손에 와 있다는 사실이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알았다.

나는 사진이 아니라,
시간을 건네받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마 바로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내 안에 쌓여 있던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전에도 내 삶은 분명 내 안에 있었다.


어린 시절의 바다,
아버지의 공구통,
엄마의 걸음,
졸업식 날의 눈물,
세발자전거와 초록병 사이다,
외할머니 집에서 혼자 집으로 걸어오던 아이.


그 모든 것들은
내 안 어딘가에 오래 쌓여 있었다.

그런데 앨범이 열리자
그것들은 더 이상 막연한 추억이 아니라,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야 할
어떤 것이 되었다.

사진은 남아 있어도,
그 사진을 둘러싼 공기와 냄새와 말투와 감정은
내가 적어두지 않으면
함께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지금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마치 둑이 터지듯
쏟아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건.

아버지가 말한 보물창고는
파일 몇 개가 아니라,

내 안에 오래 잠들어 있던 기억들을
한꺼번에 깨운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이 감정이 식어버리기 전에,

내게 도착한 이 시간을
다른 형태로 남겨두고 싶다.


아버지는 사진을 스캔해
시간을 건네주셨고,

나는 그 시간을
문장으로 다시 받아 적고 있다.


어쩌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글을 쓰는 일이 아니라,


한 세대에게서 받은 시간을
다음 형태로 남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