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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쉬폰 커튼

나의 여름날, 창가를 지키던 너의 이야기

by 희야

사계절 중 해가 가장 오래 떠있던 때.

뙤약볕에 등가죽이 축축하게 적셔지던 때.

녹색의 것들이 가장 푸르게 피어있던 때.

뜨거운 열기에 녹초가 되기도,

숨결 같은 여름 바람에 기운이 샘솟기도 하던,

그 시절을 함께 보냈던 나의 쉬폰 커튼.



연희동에 살았다. 아기자기한 카페가 즐비하여 감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곳, 나는 작년까지 그곳에 살았다. 그곳에 터를 잡기 전까지 두 군데의 집을 거쳐왔다. 앞전 두 번의 자취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머물 심산으로 집을 고르는 일에 신중을 기했다.


나의 첫 집은 상당히 낡은 집이었다. 나야 워낙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고, 빈티지한 느낌을 좋아하다 보니 뭐, 그럭저럭 살았다. 다만, 그 낡음의 정도가 심하여 한기가 가득한 겨울을 보냈더랬다. 거기다가 외진 골목 끝에 위치해 있어, 늘 어두컴컴한 귀갓길이 나를 맞아주곤 했다. 힘아리도 없어 보이는 여자애 하나가 매일 그런 길을 거쳐간다는 것에 대해, 누군가는 가슴 졸이는 하루를 보내야 했다. 꽤 난이도가 높았던 나의 첫 자취생활은, 직장을 그만둔 뒤 자연스레 정리하게 되었다.


한창 젊은이들의 메카로 이름을 날리던 홍대의 인파가 가득한 거리, 나는 그곳에 두 번째 둥지를 텄다. 이번 집은 신축 원룸으로 모든 것이 하얗고 깔끔했다. 번화가 중심지에 위치해 있으니 근처에 없는 것이 없어 편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련됨이라는 단어와는 친숙하지 않았던 나는 이 집과 영 정이 들지 않았다. 눈이 부신 하얀 형광등에 하얀색 벽지, 하얀 바닥과 가구들. 이곳에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 나의 흔적을 남겨야 했다. 나의 취향에 걸맞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무언가를 찾아보자.

핸드폰 어플로 인테리어 제품을 알아봤다. 눈에 들어오는 제품이 있었다. 약간은 어두운 초록의 풀잎들이 울창하게 늘어진 그림에, 햇빛을 차단하지 않을 정도로 얇고 비치는 재질의 쉬폰 커튼. 이거다! 이틀 뒤, 나는 내 손에 쥐어진 커튼을 들고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그마한 창문에 자리 잡게 된 초록의 쉬폰 커튼. 그날부터 그 커튼은 나의 일상 속에 스며들게 되었다.


모든 게 낯설던 시기였다. 새로운 사람들과 일을 시작하고, 전과는 다른 업무를 부여받아 새벽까지 일에 몰두하던 날이 많던 때. 그럴 때마다 쉬폰 커튼이 걸린 창가를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거리에서 기가 쭉 빨린 채로 집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내 시선이 고정되던 자리가 쉬폰 커튼이 걸린 창가였다. 도심에 있을지라도, 잠시나마 나를 푸릇한 자연 속으로 데려다주었던 커튼. 비록 새 종이처럼 뻣뻣한 느낌이 드는 집이었지만, 쉬폰 커튼이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순간에는 풀잎 향이 방 안에 퍼지는 듯했다. 나의 커튼은 그렇게 두 번째 자취 생활의 동거인이 되어주었다.



“느낌이 좋아, 이 집으로 할래.”

나무의 나이테를 옮겨 담은 듯한 장판과 갈색 몰딩, 적당히 삶의 흔적이 묻어나 옛것의 향취를 솔솔 풍기는 곳. 처음 마주한 집임에도 왠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앞서 두 번의 자취생활을 경험하고 나니, 집을 고르는 안목이 꽤나 선명해졌다. 세 번째 집은 나의 취향에 가장 부합하는 곳이었다. 나름 유명한 연희동이지만, 내가 머문 곳은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했다. 그러면서도 후미진 골목이 아니라, 푸릇한 식물들로 가득한 따뜻한 거리였다. 오래된 집이지만 기능에 문제가 없고, 무엇보다도 따뜻하다 못해 뜨끈뜨끈한 겨울을 보냈던 집이기도 하다.


집이라는 곳은, 내가 오롯이 혼자가 되어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며 나의 내면의 공간을 투영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딱 내가 감당 가능할 정도의 집을 좋아한다. 늘 깨끗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구석구석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자주 청소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 추위라면 치를 떠는 나에게 따뜻한 온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난방 시설과 튼튼한 외벽. 눈을 뜰 때 출근지옥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부정적인 기운이 아닌, 긍정이 가득 담긴 은은한 햇살을 비춰주는 창문. 이 세 가지가 나의 집을 고르는 가장 명확한 기준이 되었다. 거기에 좋은 풍경까지 덤으로 얹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경제적인 문제도 고려해야 하기에 이 부분은 희망 사항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나는 가장 만족스러운 세 번째 집을 구하게 되었다. 그곳에 나의 커튼을 매단 순간, 드디어 느껴졌다.


아, 이곳이 나의 집이구나.


사실, 커튼봉을 설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작은 베란다에 있는 빨랫대에 커튼을 매달았다는 웃픈 이야기가 숨어 있기도 하다. 아침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귀가 찢어질듯한 듣기 싫은 알람소리가 울리는 건 같았지만, 얇은 쉬폰 커튼 사이로 투과되는 적당량의 햇빛이 살며시 눈가에 와닿았다. 그 다정한 기운에 눈을 뜨면, 초록색 풀잎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쉬폰 커튼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말을 건네왔다. 너의 아침엔 늘 내가 함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의 나는 본가에 들어와 있다. 내 방에는 여전히 쉬폰 커튼이 함께하고 있다. 요즘은 소유하는 물건을 줄이고 싶은 욕구가 들기도 한다. 앞에서 말했듯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양으로. 나에게 정말 필요한 물건만 지니고 싶다. 그 안에 들어갈 목록 중 하나는, 나의 뜨거운 여름날, 창가에서 그 청춘을 함께 보냈던 쉬폰 커튼이다.



어딜 가도 너와 함께라면

그곳이 나의 거처가 되어줄 거고,

가장 아늑한 공간이 되어줄 거야.

나의 커튼아,

내일 아침도 잘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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