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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트

기록 강박증, 너는 나에게 독이 되기도, 보약이 되어주기도 했다

by 희야


01. 기록 강박증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연한 회색 느낌의 대리석으로 하고, 높이는 여기까지 오는 거로 하자. 저 유리장 문은 이만한 두께에 이런 형태로 만들어달라 하고, 잎사귀가 다섯 가닥인 나무 그림의 시트지를 붙일 거야. 시트지 크기는 가로 칠십오에 세로 육십 센티미터 정도, 나뭇잎 색상은 어두운 녹색…."

삼십 초 만에 그림 하나를 뚝딱 완성해 내는 그의 혀 놀림에, 검정 펜 한 자루가 노트 위에서 현란한 곡예를 부리고 있다. 수만 개의 촛불이 늘 그의 머릿속을 밝히고 있다. 촛농이 떨어지기 전에 모든 아이디어를 내뱉어야 하는 그와, 그 모든 걸 기억해야만 하는 나. 공중에서 마구 뛰어다니는 저 단어 조각들을 재빨리 내 노트 안으로 포획해 와야 한다. 그의 입은 이미 오 층짜리 건물 한 채를 지었다. 그의 주문은 늘 애매모호하다. 두 시간 동안 와다다 쏟아내는 뜬구름같은 이야기를, 손이 베일 듯 매끈하게 깎인 나무 선반처럼 정갈하게 다듬어야 한다. 이 모든 걸 가능케 하기 위해, 나는 '기록'이라는 무기를 장착했다.


처음에는 그의 말과 해야 할 일을 조금씩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한 권, 두 권, 여러 권의 노트가 쌓이고, 수많은 글자가 노트에서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글자로는 부족했다. 혹시 모를 오차를 줄이기 위해 이미지 역시 함께 기록했다. 머지않아 핸드폰은 용량도 가득 차 버렸다. 내가 들 수 있는 가방은 오로지 대형 백팩 하나였다. 거기에 항상 나의 모든 기록이 들어있는 노트북을 비롯한 여러 권의 노트, 두꺼운 서류함을 넣어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든 생각날 때마다 꺼내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등에 이고 다녔다. 내 귀에 들리는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 하나라도 놓칠세라 매 순간 모든 것을 기록했다.


부모님의 생신날이었다. 예약한 식당에서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그런 자리. 달콤 짭짤하게 양념 된 붉은 소갈빗살이 불판 위에 놓이고,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구워진 고기가 각자의 접시 위에 한 점씩 올라왔다. 누군가는 고기를 씹으며 가득 흘러나오는 육즙을 느끼고, 누군가는 근황 이야기를 꺼내며 따뜻한 온기를 전한다. 그 사이에, 그들과 부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있다. 손에 쥔 핸드폰에 시선이 고정된 사람, 바로 나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는 와중에도, 나는 오로지 기록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던 거다. 무언가 생각이 날 때마다 어딘가에 바로 적어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건물이 두 갈래로 나뉘어 보일 정도의 큰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결국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변기 위에 앉아 핸드폰에 열심히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차에 타자마자 노트를 꺼내서 바로 옮겨적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무릎을 세우고 손가락에 힘을 줘가며 펜촉이 중심을 잃게 하지 않으려 애썼다. 사실 그다지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적어야 했던 거다.

그날 이후로도 누구를 만나건 기록을 해야한다고 느끼는 순간 화장실로 향했다. 큰일을 본다는 명목으로 시간을 벌고, 남의 인분 냄새를 맡으며 변기 위에서 무언가 적곤 했다. 불쾌한 냄새에 숨을 참는 게 익숙해질 때쯤, 느꼈다. 나, 기록 강박증이구나.



02. 기록 강박으로 얻은 것

내가 가장 큰 성취를 이뤘던 때가 있다. 바로 이 기록 강박이 가장 심하던 시기, 정확히 말하면 이런 증상을 얻게 된 직장에 다니던 때이다.

많은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직장이 그렇겠다만, 그곳은 더욱이 그랬다. 우리 대표님은 바닥에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통통 튀어 오르는 탱탱볼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가지의 아이디어가 번뜩 떠오르고, 그것을 빠르게 실행시켜야 마음 편히 잠들 수 있다는 혁신적(진취적)인 사업가. 그의 머릿속에서 팝콘이 뻥-하고 터질 때, 기록의 힘도 함께 폭발했다.


나의 기록장은 그의 뇌를 담고 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를 전부 기록한다.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같아도, 지나가며 툭 던진 이야기도, 하다못해 그의 음식 취향이나 건강 상태까지. 이런 자잘한 이야기들이 모이면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를 상대할 때 가장 힘든 점이 시시때때로 변하는 그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금방 까먹어버리는 그의 건망증이었다. 처음에는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에 관한 모든 걸 노트에 적었다. 겉모양이 아무리 많이 바뀐다 해도, 알맹이는 분명 하나일 테니까.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고 나니, 자연스레 정리 능력치가 뒤따라 올라온다. 그가 내뱉은 단어들을 전부 메모하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풀어서 정리한다. 정리한 내용을 한 발 떨어져서 쓱 둘러보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한눈에 들어온다. 풀어낸 큰 목록을 위해 필요한 하위 목록들이 생겨나고, 이 모든 것들의 중요 순위를 나눈다. 그런 다음, 순서대로 하나씩 실행해 나간다. 그 와중에도 그의 입은 닫힐 줄 모른다. 한 가지 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 가지의 일이 더 생겨난다. 이 많은 임무를 일주일 만에 완수해내야 한다고? 암, 그렇고말고. 나만의 노트 정리법을 활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가 머릿속에 설계도를 구상하면, 나는 글로써 그의 세상을 구현해낸다. 그렇게 환상의 조합이 탄생한다. 사업이 점점 확장되며 매출은 쭉쭉 오르고, 그의 지갑이 두둑해질수록 나의 위상도 올라갔다.


기록 강박으로 얻은 건 돈과 명예인 걸까? 그것들은 아주 잠깐 내 손을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기록 강박으로 지낸 세월이 흐르고 지금까지 나에게 남아 있는 건, 어떤 큰 일이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딱히 대단한 능력은 필요하지 않다. 작은 습관들이 차곡차곡 쌓인 나의 몸은 어느새 단단한 내구성을 지니게 되었으니.

먹을 것이 부족해서 밥을 먹지 못해도 귀한 보약을 달여 먹은 것처럼 속이 든든했다. 그렇다고 강철로봇이 된 건 아니다. 여전히 어떤 일은 계속해서 뒤로 미뤄지고, 의지를 상실하여 길바닥 한가운데 주저앉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믿는다. 그런 나라도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걸.



03. 기록 강박으로 잃은 것

언젠가부터 풀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마치 딱딱한 돌처럼 굳어있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 비가 온 뒤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축축한 흙냄새, 분주한 사람들의 움직임, 진동을 타고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얻은 정보를 뇌를 거치지 않고 무조건 기록부터 하다 보니,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세상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기록 강박은 나의 일상 속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좋은 노래가 귀에 들어오면 감상하거나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선 적고 본다.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면 사진부터 찍고 본다. 마음에 드는 글귀나 유용한 정보가 있으면 우선 기록부터 하고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얻은 것들은 내 것이 되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흘러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는 다양한 감각을 통하여 내 몸에 스며들어오게 된다. 마음을 통해 깊이 느끼고, 뇌를 거쳐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과정들을 통하여 그 정보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음식의 황홀한 맛이나 침이 고일 만큼 맛있는 냄새, 혹은 강렬한 색감이나 먹음직스러운 모양새 등, 여러 가지 것들을 통하여 그에 대한 기억을 남긴다. 이런 것들의 공통점이 뭘까. 바로 경험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생략했다. 오로지 적는 행위에만 몰두하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적어댔는데,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이후 다시 노트를 열어봐도 그것들에 대한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학교에서 받아쓰기 백 점을 맞아왔는데, 그 단어들의 속뜻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도 같았다.


"뭐더라? 그게 뭐였더라."

건망증이 생긴 걸까. 요즘 들어 사소한 것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면 기록장이나 핸드폰을 뒤져본다. 거기에 있는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야 기억이 되살아난다. 내 기억력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정신적으로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록 강박으로 인한 부작용 중 하나였다.

앞에서 말했듯 생각을 거치지 않고 적어대기만 하다보니, 잠깐이라도 머릿속으로 기억하려고 한다거나 되새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적었으니 된 거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렇다 보니, 더욱더 기록하는 습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적지 못하면 불안했고, 노트가 없으면 세상을 잃은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글자를 쓴 건 나인데, 어느새 그 글자들에 지배되어 버린 것이다.



04.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도구를 가지고도, 어떤 디자이너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어떤 디자이너는 촌스럽고 어수선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도구는 같지만, 그것을 배열하고 조화시키는 감각과 경험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건 아주 좋은 습관 중 하나이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것이 나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나의 손에 달려있다.


친구이자, 선생이자,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했던 나의 노트. 불안을 키우기도, 잠재워주기도 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나의 도구.

앞으로는 너와 나의 관계 사이, 그 적정선이 어디쯤인지 잘 한번 찾아봐야겠다. 가끔은 너무 가까워서, 또 가끔은 너무 멀어서 진짜 전하고 싶은 의미를 놓치기도 하니까. 그게 관계를 잘 유지하는 방법이라고도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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