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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랍자문

모험을 떠나, 새로운 경험으로 얻은, 그 모든 것이 응축된 맛

by 희야

그런 날이 있다. 갑자기 한 가지 음식이 뿅 하고 떠오르고 미친 듯이 당기는 날.

머릿속에서는 이미 그것을 탐닉하는 미식회가 열렸다. 눈으로는 탐스러운 외형을 탐미하고 혀로는 진한 풍미를 만끽하며, 이빨로는 생생한 식감을 즐기고 있다. 한 번 떠오르면 절대 사라지지 않는 상상의 맛. 이런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 있다. 또 '가짜 식욕'이 도지셨군요! 진짜 배고픔은 음식 종류와 상관없이 단순히 음식을 원하는 것이지만, 가짜 식욕은 어떤 특정한 맛이나 음식을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증상을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음식, 이것은 나의 무의식이 원하는 음식이다. 왜 이 음식이 떠올랐을까? 특정 영양소가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물에 젖어 축 처진 듯 무겁게 가라앉은 나의 기분을 살피지 못했던 걸까? 그래서 이 음식으로 나의 마음을 달래주라며 신호를 보내는 걸까? 입안에 떠오른 맛의 조각을 더듬다 보면, 때로는 그 너머에 숨겨진 이야기의 뿌리를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얼마 전, 내게도 마음의 심연을 조용히 건드린 음식이 있었다.



• 굴랍자문 gulab jamun

; 우유 가루를 반죽하여 튀긴 동그란 도넛을 장미 시럽에 재운 인도의 전통 요리. 단맛이 매우 강하다.

(네이버 사전)


며칠 전의 일이다. 어둠이 해를 가린 저녁, 고요한 거실에 홀로 앉아 있던 때. 문득 갑자기 굴랍자문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시간이나 상황도 생뚱맞거니와, 굴랍자문은 한국인이 흔히 접하는 평범한 음식도 아니다. 이유가 어쨌건, 머릿속에 동동 떠오른 굴랍자문의 이미지에 곧바로 나의 침샘 역시 연달아 반응했다.

'아냐, 차라리 내일 진짜 맛있는 인도 음식점을 찾아가 보자. 참자, 참아.'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일을 하며 식욕을 잊어보려 해도, 여전히 눈앞에 동글동글한 굴랍자문이 계속해서 굴러다녔다. 그뿐인가. 나중에는 굴랍자문이 탱탱볼처럼 바닥에서 통통 뛰어다니기까지 했다.

'안 되겠다. 이건 지금 굴랍자문을 먹어야 한다는 신호야. 내일은 아냐, 지금 당장 먹어야만 해.'

결국 굴랍자문을 먹겠다고 다짐한 나는, 곧장 배달 앱을 켜고 인도 음식점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시계의 시침이 숫자 12를 가리키는 시간, 이 시간대에 굴랍자문을 팔고 배달까지 하는 인도 음식점이 많을 리 없다. 그래도 선택권은 있다. 배달 앱에서 굴랍자문을 파는 곳이 딱 두 집이 있었는데, 그중 조금 더 로컬 느낌이 강한 집을 선택했다.



그렇게 도착한 굴랍자문. 동글동글하니 귀여운 모양새를 한 것이 두 개가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귀엽게 생긴 음식을 참 좋아하는 거 같다. 공교롭게 그 맛까지 내 취향과 맞다. 꿀 속에 잠겨 있는 윤기가 가득한 굴랍자문의 외형. 젓가락으로 한 알을 집어 들자, 찐득하고 달큰한 향을 풍기는 꿀 몇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진하고 무거운 꿀의 향이 콧구멍을 타고 들어와 온몸 깊숙이 스며든다. 먹기도 전에 몸이 녹아버리는 듯했다. 살며시 한 입을 베어 물어 본다. 찌부된 굴랍자문 사이로 꿀과 시럽이 마구 흘러넘쳤고, 이윽고 입안은 온통 찐득하고 달달한 맛으로 가득 차버렸다.

'으윽, 이 맛이 아니야.'

달다. 달아도 너무 달다. 심하게 달다. 원래 굴랍자문이 달콤한 디저트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닌데. 굴랍자문 특유의 미세하게 느껴지는 고소한 맛이나 매력적인 식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단 맛만이 가득했다. 이럴 거면 집에 있는 설탕을 뜨거운 물에 녹여서 퍼먹지, 그런 생각도 했다. 실망감이 가득했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던 맛은 이 맛이 아니다. 어차피 늦은 시간에 아무 집에서 배달을 통해 먹게 된 굴랍자문인데, 뭐 그리 대단한 걸 기대했을까. 처음 접했던 굴랍자문의 맛이 너무도 황홀해서였을까. 그날의 굴랍자문을 기대했던 걸까.



내가 처음으로 굴랍자문을 맛보았던 날,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직장에서 꽤 오래, 영혼을 갈아서 일하던 시기였다. 그런 태도에 걸맞게 실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작은 나라 하나를 진두지휘하던 때. 한마디로 한창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으로 살던 시절이다. 일이 곧 나고, 내가 곧 일이었다. 쉬는 날 없이 일하는 게 일상이던 나에게, 그날은 오랜만의 휴식을 맞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얼마만의 휴일인가. 우선 늦잠을 푹 잤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켜서 업무가 올라오는 단톡방을 들어간다. 아, 이게 아니지. 맛있는 거나 먹어 볼까. 배달 앱을 들락날락해본다. 에이, 그래도 모처럼의 휴일인데 밖으로 나가 보자. 세수와 양치만 후딱 하고 거리로 나가 본다. 어디를 가야 하나.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직장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근처를 제대로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날씨가 좋았다. 따뜻한 햇빛이 내리쬐는 가을 오후의 골목은 나의 걸음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딱히 갈 데도 없으니, 마음이 끌리는 대로 걸어 다녀 보자. 사람이 많은 번화가는 싫어, 한적하고 후미진 골목길을 탐색해 보자.


한참을 걷다 보니 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빈티지한 녹색 간판에 알아볼 수 없는 외국어로 쓰여진 글씨. 외관도 낡고 어두운 회색의 작은 건물이었다. 1층의 좁은 입구에서는 이국적인 향이 은은하게 새어 나온다. 그래, 여기다. 나는 곧장 좁은 입구로 들어가 좁고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2층에 도착하자, 간판과 같은 녹색의 출입문이 보인다. 배가 고파서 그런 건지, 내가 발견한 새로운 장소에 대한 기대감이었는지, 왠지 모를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외부와는 또 다른 느낌의 공간이 펼쳐졌다.

'와아, 너무 좋다.'

내부는 꽤 넓었다. 월넛 색상의 어두운 나무로 이루어진 테이블과 가구들, 간판과 같은 녹색의 벽지, 그리고 곳곳에 희귀한 장식품들이 놓여 있어, 이상한 나라의 음식점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아, 이곳은 인도 음식점이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에,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조금 뻘쭘하긴 했지만 일단 가장 안쪽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그러자, 속눈썹이 짙고 특이한 자주색 옷을 입은 남성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온다.


@&*&%^&%#$%#$5?


잉?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쏟아내는 외계어와 달리, 활짝 웃고 있는 표정에서 익숙한 친근함이 느껴진다. 처음 온 장소에, 말도 통하지 않는 직원과 마주하고 있는데, 왜 이리 편안한 느낌이 드는 걸까.

나도 밝은 미소와 함께 짧은 영어 단어와 유연한 바디랭귀지를 동원하여 소통을 이어갔다. 그렇게 원하는 메뉴를 주문했다. 시간이 꽤 지나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매콤한 치킨크림커리, 굴랍자문, 라씨를 주문했던 걸로 기억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친절한 남직원이 마치 공주님을 대접하듯 매우 정중한 태도로 음식을 세팅해 주었다. 뜨거운 김이 솔솔 올라오는 것이, 주문이 들어오면 직접 음식을 만드는 듯했다.

그 맛은 어땠느냐, 기억에 남을 만큼 황홀한 맛이었다.

부드러움 속 약간의 톡 쏘는 매운맛과 쫄깃한 닭고기, 달지 않고 상큼한 맛이 강한 신선한 요거트 음료 라씨. 환상의 조합이었다. 커리를 다 먹고 나니, 조그맣고 어두운 갈색을 한 동그란 디저트가 보였다. 딱히 큰 특징도 없고 그다지 볼품없는 모양이었다. 아, 그냥 큰 의미 없는 주전부리인가 보다. 별 기대 없이 첫 입을 베어 물었을 때, 그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에, 달콤한 꿀이 조금씩 새어 나오더니 마지막에는 고소한 우유와 치즈 그 중간의 향이 코끝을 스친다. 완벽한 마무리였다.


처음으로 굴랍자문을 맛보았던 그날. 나는 왜 유독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걸까.

그날의 굴랍자문이 특별했던 건, 단지 음식의 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날은 내가 오랜만에 쉼의 시간을 가진 날이었다. 돌이켜보면, 다른 휴일에는 가족들 혹은 가까운 연인이나 친구, 직장 동료들과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오롯이 혼자가 되어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게 된 날, 그날은 그런 날이었다. 그런 특별한 날을 평소와 같이 흘려보내지 않은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집 밖으로 나가 처음 거닐어보는 길목에 발을 딛고, 지도도 없이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걸어 다녔다. 그런 시도를 통해 또 다른 새로운 공간, 이국적이고 따뜻한 공간에서 새로운 경험을 맞이할 수 있었다. 당찬 모험심을 가득 품고 미지의 땅으로 모험을 떠나, 아름다운 숲과 따뜻한 사람, 그리고 황홀한 맛을 발견해 낸 경험.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응축된 맛, 그것이 굴랍자문의 맛이 아니었을까.




젊은 날의 패기였을까. 그런 모험을 떠날 수 있었던 건, 한창 잘 나가던 때라 겁이 없었던 걸까? 자존감이 높았던 시기라 그런 걸까? 도전과 모험을 두려워하는 지금의 내가 된 건, 나이가 먹어서 그런 걸까. 좁아진 기회의 폭과 무거워진 실패의 무게 때문에 그런 걸까. 겁이 많아진 만큼 생각이 너무 많아져 그 무게 때문에 쉽사리 움직일 수 없게 된 것도, 나이가 먹어서 그런 걸까.


얼마 전, 갑자기 굴랍자문이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수도 없이 생각을 반복하고 두려움이라는 눈덩이를 끊임없이 굴리고 굴린 결과, 너무나도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나를 짓누르는 요즘. 나의 무의식이 저 깊은 심연 속에서 굴랍자문을 꺼내 온 건 아닐까.

봐라, 너도 이렇게 겁이 없고 모험심이 강하던 때가 있었지 않니. 생각을 내려놓고 밖으로 걸어 나간 그때, 덕분에 행복한 경험을 맞이할 수 있지 않았니. 물론,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을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았을 때가 더 많았을지도. 그치만 굴랍자문을 처음 맛보았던 그날의 기억이 유독 강렬하게 남아있지 않니. 때로는 생각을 멈추고 그냥 발을 한 걸음 떼어 보렴. 눈을 꼭 감고 그냥 걸어나가 봐. 일단 부딪쳐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저 선반에 앉아 있는 인형과 다를 게 없잖아?



어느 날 갑자기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음식, 이것은 나의 무의식이 원하는 음식이다. 왜 이 음식이 떠올랐을까? 특정 영양소가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물에 젖어 축 처진 듯 무겁게 가라앉은 나의 기분을 살피지 못했던 걸까? 그래서 이 음식으로 나의 마음을 달래주라며 신호를 보내는 걸까? 입안에 떠오른 맛의 조각을 더듬다 보면, 때로는 그 너머에 숨겨진 이야기의 뿌리를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그날 처음 맛보았던 굴랍자문의 맛, 나는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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