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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형, 월레스와 그로밋

이토록 비효율적인 너희들에게서 어린 시절의 나를 보았다

by 희야
인형들의 공간

내 방 한 켠에는, 인형들이 모여있는 공간이 있다.

월레스와 그로밋, 짱구와 짱아, 이웃집 토토로, 스폰지밥의 뚱이, 빵빵이와 옥지, 라바,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비둘기 인형까지. 사실 나는 인형을 막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동심은 잃어버린 지 오래고, 아기자기한 것, 귀여운 장식품 같은 것들을 썩 선호하지는 않기에. 옷을 입어도 무채색 계열의 옷을 즐기고, 차분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알록달록한 것들이 정신 사나울 뿐이다. 게다가 방에 물건을 많이 두는 것을 불편해하는 나에게, 차지하는 부피에 비해 그다지 쓸모가 없는 인형은 불필요한 장식품 중 하나일 뿐이다.


어느 날, 이런 나에게 인형이 생기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선물로 시작된 인형들의 모임. 하나, 둘, 셋, 넷.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한 무더기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아휴, 이 많은 걸 다 어디에 쓴담. 일단 한 공간에 몰아두자.' 그렇게, 벽면에 세워둔 책장 한 칸에 인형들의 거처를 마련했다. 이렇게 모아두니 나름 귀엽기도 하다. 침대에 누우면 인형이 눈에 딱 들어오는 구조다 보니, 가끔은 그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자꾸만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온종일 저 자리에 앉아서 나를 관찰하는 게 하루 일과인 듯한 인형들. 참으로 비효율적인 물건이 아닐 수 없다.



숀(양)과 그로밋(강아지)

그래도 이 중 나와 연이 깊은 친구들이 있다. '월레스와 그로밋(Wallace & Gromit)'에 나오는 인형, 숀(Shaun) 그로밋(Gromit)이다. 월레스와 그로밋은 내가 어릴 적 즐겨 보던 애니메이션이다. 이 만화를 회상하면, '그로밋-!' 하고 손을 흔드는 월레스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살짝 삐뚤어진 눈썹, 울퉁불퉁한 볼, 투박한 살결. 쫀득한 지점토를 손으로 하나하나 빚어내, 사람의 온기가 묻어난 듯한 따뜻한 질감. 클레이 애니메이션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손자국이 남아 매끈하지 못한 표면과, 그걸 뚫고 나오는 자연스러운 입체감에 정말 그들이 그 세상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거 같기도 했다. 나는 이 만화를 유난히 좋아했다.



월레스와 그로밋, 고양이와 함께 지내던 옛날 집의 풍경 1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회차가 있다. 바로 '화려한 외출(A Grand Day Out│1997)'이다.

‘화려한 외출’은 월레스와 그로밋이 치즈를 구하러 달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치즈와 크래커, 그리고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월레스. 그는 어느 날 벽장에 치즈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고, 치즈를 구하기 위해 치즈로 만들어진 '치즈 달나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운다. 발명가인 월레스는 그로밋과 함께 달나라로 가기 위한 로켓을 만들어 내고, 그 로켓을 타고 '치즈 달'에 착륙하는 것에 성공한다. 온통 치즈로 덮인 달,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해 온 포크, 나이프, 크래커 등이 담겨 있는 소풍 보자기를 푼다. 그리고 치즈 조각을 잘라 크래커 위에 얹고, 한 입 베어 물고는 만족한 표정을 짓는 월레스.

그 뒤의 이야기가 조금 더 있지만, 주 내용은 이런 식이다.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월레스와 그로밋이 달나라에서 치즈를 베어 먹는 장면이 왜 그리 좋았는지, 어쩜 그리 맛있어 보였는지. 그래서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 또 보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돌려보곤 했다. 마치 우리 집 배경 화면인 양 늘상 틀어져 있던 장면. 그 장면을 틀어놓기만 해도 왠지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안 사정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시기가 있었다. 다시 언덕을 오르기 위해 열심히 일하던 부모님은 늘 밖에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그럴 때면, 월레스와 그로밋이 내 곁에 함께 있어 주니까. 그들과 함께라면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가장 설레던 시간이 있다. '치즈 달나라' 이야기를 보고, 엄마에게 식빵을 사다 달라고 부탁한다. 식빵이 집에 도착하면, 집에 있는 버터와 잼을 준비한다. 식빵 위에 반쪽은 버터, 반쪽은 잼을 바른다. 그리고 월레스와 그로밋과 함께 식빵을 한 입 베어 문다. 여기가 천국일지도 모르겠다.



월레스와 그로밋, 고양이와 함께 지내던 옛날 집의 풍경 2

나의 어린 시절, 낡은 옛날 집, 그 모든 시간을 함께해준.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때의 그 공간으로 나를 다시 데려다주는. 어쩌면 삶은, 비효율이라는 작은 틈에서 숨을 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비효율적인 물건 덕에 다시 한번 재생 버튼을 눌러본다. 월레스와 그로밋, 오랜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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