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풍경을 닮은 그녀의 삶, 그 곁을 지킨 낡은 가방과 필통
바야흐로, 봄이 왔다. 올해의 봄은 특별하다. 어느덧, 그녀가 학습지 선생님 생활을 시작한 지 이십 년 차에 접어드는 계절이 찾아왔으니 말이다. 어두운 새벽을 몰아내고 솟아오른 봄날의 햇살, 차갑게 얼어버린 단단한 대지를 뚫고 피어오른 녹색의 줄기들. 봄날의 풍경은 그녀와 닮아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풍파가 가득한 세상에서 굳건히 맑음을 유지하던 그녀. 그녀를 '박 선생'이라 부르려 한다. 오늘은 언제나 맑음, 박 선생의 이야기를 살그머니 들여다본다.
박 선생의 학습지 선생님 입문기
박 선생은 늘 성실했다. 그 성실함을 무기 삼아, 한때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에 몸을 담았던 그녀. 열렬히 일하고, 암벽을 오르고,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서 낯선 땅에 발을 딛고 힘차게 걷던 그때. 커리어 우먼의 삶이 통상적이지 않던 그 시대에도, 박 선생의 이십 대는 찬란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똑 부러진 그녀라도, 사랑 앞에서는 순수한 소녀였다. 그것의 정의도 잘 모르고서 말이다. 그녀는 평소와 같이 낯선 땅에 발을 디뎠고, 겁도 없이 걸어 나갔다. 그 땅이 어떠한 위험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씨앗을 뿌렸다.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하고 고운 것으로. 얼마 안 가 파릇파릇한 두 개의 새싹이 돋아났다. 그녀는 그것들을 누구보다 푸르게 피워낼 거라고 다짐하고, 또 바랐다. 그런 바람과 달리, 이번 땅은 이제껏 만나온 것들과 달랐다. 비옥해 보였던 땅은 금세 메말랐고, 큰 재해가 연거푸 몰아쳤다. 폭풍이 이는가 하면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는가 하면 산불이 일었다. 이제 그녀는 혼자였다. 혼자서 그 새싹들을 지켜내야 했다. 한때는 커리어 우먼으로 불리던 그녀였지만, 오랜 시간 새싹만 돌보던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녀의 어릴 적 꿈 중 하나가 학교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에 자신이 있던 그녀. 두 새싹도 돌봐야 하고, 평생에 필요한 양분도 얻어와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학습지 선생님이 되기로 했다. 그렇게, 박 선생으로서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된다.
순탄치 않은 학습지 선생님의 세계
그 당시 박 선생은 자가용이 없었다. 자가용이 없는 학습지 선생님의 양 손에는, 언제나 교재가 가득 담긴 무거운 책가방이 꼭 붙어 있었다. 덕분에 박 선생은 남는 손이 없는 사람이었다. 남는 손이 없는 사람에게는 현관문을 나서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팔꿈치로 문을 열고, 발재간으로 문을 닫으며 요란한 동작을 선보이는 그녀. 박 선생의 하루는 요란하게 시작된다.
- 안녕하세요 어머님, 반가워 민수야.
온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는 박 선생. 무거운 책가방이 들린 그녀의 손등에 파란 핏줄이 톡- 하고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런 손등이 가려질 만큼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 오늘도 박 선생은 초승달 모양의 눈을 하고, 입꼬리를 한껏 올린 표정을 온종일 유지한다. 학습지 세계에서 아이와 엄마는 그녀의 왕이나 다름없다. 학습지 일은 계속해서 고객을 유치해야 하는 영업이었다. 이들이 학습지를 그만둔다는 선택의 문을 열고 나가면, 그 문으로 지부장의 쓴소리가 대신해서 들어온다. 학습지 선생님의 출퇴근 시간도 이들에 의해 정해졌다. 아이가 집에 늦게 돌아오거나, 공부하기 싫어서 떼를 쓰거나. 그런 갖가지 이유로 수업 시작 시각이 늦어지기 일쑤였고, 다음 수업이 연달아 밀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박 선생은 매일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박 선생의 식사 시간과 화장실을 가는 시간 역시 쉽사리 허락되지 않았다.
- 어머님, 죄송하지만 지금 해지하는 건 어려우세요. 전에 말씀드렸듯이 이번 달에 해지하시려면, 지난달에는 미리 말씀해 주셔야 했거든요. 이미 본사에서 이번 달 교재가 나와서….
- 그런 게 어딨어요? 제가 그만하고 싶다는데, 아이도 도저히 못 하겠다는데 억지로 돈을 내고 수업을 들으라는 말이에요? 지금 당장 환불해 주세요.
혹여나 핸드폰을 쥐고 있는 왼손이 들을세라, 박 선생은 푸른 핏줄이 튀어나온 오른쪽 손으로 조심스레 가슴을 콩콩 두드린다. 시간표의 빈틈을 찾아 들어온 편의점, 그곳에서 허겁지겁 김밥으로 요기를 때우던 찰나에 이런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조급해 죽을 지경이다. 박 선생은 바로 다음 수업도 가야 하고, 고객의 이탈도 막아야 한다. 결국, 고객이 통화를 끊지 않아 그날 모든 수업에 늦게 되었고, 통화를 하던 고객은 본사로 전화해서 항의를 했다. 곧이어 본사의 재판이 이루어진다. 재판 시간은 짧았다.
- 박 선생에게 교재값을 청구합니다. 이런 정책을 만든 건 우리고, 박 선생이 고객에게 미리 고지도 하였고, 그걸 어긴 건 고객이고, 그런 고객의 요구를 들어준 것도 우리입니다만. 그래도 모든 건 박 선생의 책임입니다. 박 선생이 본사에 교재값을 지불하십시오.
그렇게, 박 선생은 오늘도 죄인이 되었다.
이쪽 세계도 만만치는 않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박 선생. 그녀를 반기는 건, 차갑게 얼어버린 새싹들이었다.
새싹이 자라나기 위해서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따스한 햇볕, 적당한 빗물, 비옥한 토지, 좋은 흙,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 추위를 막아줄 비닐하우스, 홍수를 막아줄 댐…. 박 선생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그것들을 제공하기 위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박 선생의 비닐하우스는 자꾸만 찢어졌다. 단단하지 못한 댐은 쉽사리 무너졌고, 땅은 자꾸만 메말랐다. 그녀 혼자서 이 인분의 몫을 해내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양분을 고루 받지 못한 새싹은 연약해서 쉽사리 찢어졌다. 보호막 없이 재난 상황에 놓이게 된 새싹은 잎사귀를 질기고 딱딱하게 만들었다. 그 굳기는 돌덩이처럼 딱딱해져, 물기를 흡수하지 못하는 몸이 될 지경까지 이르렀다. 박 선생은 남는 손이 없는 사람이었다. 두 새싹이 온전히 잘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요란한 동작을 선보이는, 그런 박 선생이 되어야 했다.
하늘의 별 따기 미션을 완수한 박 선생
시간이 흘렀다. 박 선생에게도 자가용이 생겼다. 든든한 자가용만큼이나 굳건한 학습지 선생이 된 그녀. 연륜은 뿌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비교적 순탄하게 학습지 일을 이어가고 있는 박 선생도, 어느덧 석양을 기다리고 있다. 박 선생의 가방이 한결 가벼워졌다. 여유로워진 시간표 덕에 밥도 편하게 먹는다. 박 선생은 알고 있다. 학습지 선생님으로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는 많이 낡아버린 박 선생의 가방과 필통이 그것을 예측하게 한다. 박 선생의 가방이 낡아갈수록, 그녀의 삶은 한결 더 윤택해졌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가방을 잘 바꾸지 않는다. 투철한 절약 정신 때문인지, 그녀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소중한 물건이라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박 선생의 새싹들도 제법 잘 자라났다. 그녀의 키보다 훨씬 더 커져 버린 그들이다. 박 선생과 그들의 시간은 반대로 흘렀다. 박 선생은 갈대처럼 조금씩, 조금씩 굽어가고 있다. 그것 또한 알고 있는 박 선생이었다. 그런들 어떠하랴. 그녀의 새싹들은 누구보다 파릇한 녹색의 그것으로 피어올랐다. 점점 무거워지는 몸의 무게와 달리, 박 선생의 마음은 계속해서 가벼워지고 있다. 요즘은 부쩍 웃음이 늘어났다. 얼굴에 힘을 주고 만들어낸 웃음이 아닌, 자연스레 피어나는 느슨한 미소. 하늘의 별 따기를 성공한 자의 여유인 것일까.
어두운 새벽을 몰아내고 솟아오른 봄날의 햇살, 차갑게 얼어버린 단단한 대지를 뚫고 피어오른 녹색의 줄기들. 봄날의 풍경은 그녀와 닮아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풍파가 가득한 세상에서 굳건히 맑음을 유지하던 그녀. 하늘에서 별을 따는 일을 기어이 완수해 낸 그녀. 나는 그녀를 '박 선생'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