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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불확실을 넘어 돌파구를 찾는 방법

가장 확실한 감각을 따라가는 여정

by 이구름

Episode 3.


흔히들 그런 말을 한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고. 온 마음을 다해 동의한다.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맞다고, 그저 버티면 된다고, 조금만 더 가면 많은 게 달라질거라고, 스스로의 입과 귀를 틀어막고, 허겁지겁 앞만 보고 지난 몇 년을 보냈다. 그렇게 나를 다 불태워 소진해버리고 나니, 정말로 진심을 다해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잠시 멈춰서 내 인생의 방향을 다시 조정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그 방향을 다시 잡고, 영점 조절을 하는 게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있다는 주관적인 감각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나도 모르게 직업의 세계에서 이 시간이 '공백기'라고 이름 붙여지고 있기 때문일까?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 공백의 시간을 해명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걸까? 방향을 다시 바로 잡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려야 하는 일인지 누가 정해 놓은 것은 없다. 사실 자신이 진정으로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감각이라는 건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끝날 때까지도 획득하기 어려운 감각 아닌가 싶다. 다만 수입 없이 잔고가 줄어들기만 하는 시간이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것에 조금씩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이건 정말 현실적인 문제니까. 그런데 우습게도, 좀 더 솔직해져 보자면 나의 이 불안함의 이유가 단지 그뿐이라기보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 같다. 모두가 각자의 인생에 +를 더해갈 때, 나 혼자 - 혹은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 괜스레 불안한 거다. 건강도 체력도 되찾았으니, 지금쯤이면 방향을 고쳐 잡고 어디로든 다시 힘차게 나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불심검문처럼 나를 쿡쿡 찌르고 있다. 감사하게도, 그간 내가 열심히 달려왔으니, 쉬고 싶은 만큼 푹 쉴 수 있도록 지지해 주신 부모님조차도 이제는 슬슬 다시 사회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은근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신 것 같다. 그러한 은근한 생각들은 일상 속 순간순간의 말들에서 슬며시 새어 나와 의도치 않게 나를 쿡 찌른다. 이것도 일종의 불심검문 같은 거다. 슬쩍 엄마에게 "나도 책 내고 싶어~"라고 말해봤는데, 아이고? 하는 표정으로 "나중에 일하면서 내~"하는 가벼운 대답에 나의 작은 용기는 스크래치가 날 정도로 연약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주는 가장 현실적인 말들은 왜 이리 내게 상처가 되기 쉬운 건지 모르겠다. 그것이 애정과 걱정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난 그저 가족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지지만을 받고 싶은 것 같다. 신발끈은 고쳐 묶었다만, 아직 명확히 어디를 향해 달려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는 철부지가 되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냥 내 삶에서 명확하게 느껴지는 감각의 파편들은 있다. 내가 인생에 걸쳐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은 감각, 지속하고 싶은 감각,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감각, 평생 못하게 하면 미칠 것 같은 감각 말이다. 어쩌면 대자연이 부여한 가장 현명한 시스템으로서, 그런 설명되지 않는 감각—오감과 육감—라는 것이야말로 가장 명확한 신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8년 전, 지인 중에 도자기를 빚는 도예가 한 분이 해주신 꽤 인상적인 이야기가 내 마음속 한편에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분은 원래 피아노를 전공했었는데, 예술 대학 진학 후 어느 즈음 피아니스트로서의 문이 너무 좁게 느껴져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기로 마음먹게 되었다고 한다. 피아노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여전히 피아노를 치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그때 그분이 새로이 진로를 탐색할 때 채택했던 방법은,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감각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피아노를 칠 때 페달을 밟고, 손 끝으로 건반을 누르며 손을 쓰는 그런 종류의 감각을 좋아했는데, 도자기를 빚는 일이 그런 감각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아주 많아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는 거다. 피아노와 도예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로서는 그런 발상이 난생 처음이었다! 그렇게 그분은 도예가로서 아주 멋있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분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당시 내게 해주신 이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어서, 내 마음 깊숙한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었다. 나중에 나도 무언가 결정적인 탐색이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이성적 논리의 틀에만 갇히지 말고 내 몸이 기억하는 감각에 기반해서도 고민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 그런 순간이 아닌가 하고, 8년 전 그때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말 나온 김에 내가 확실하게 이끌리는 감각의 파편들을 끄적여본다.



손과 발의 감각으로 보는 피아노와 도예


첫째,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릴 때, 내 삶은 그저 명료해진다. 숨이 차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헉헉거림 속에는, 그저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감각과 뭔가를 해냈다는 작은 성취의 쾌감이 담겨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육체가 주는 명료함을 사랑하게 되었다.

둘째, 어떤 방식으로든 무언가를 창작하고 생산해 낼 때 한없이 몰두할 수 있다. 가장 원초적으로는 빈 화면 앞에 앉아 글을 쓸며 의미 있는 무언가로 그 공백을 채워갈 때, 채워진 화면을 다시 읽으며 더 나은 글로 고쳐갈 때 즐겁다. 꼭 글이 아니더라도, 그게 하물며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몇 안 보는 허접한 릴스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창작물로 사람들과 연결될 때 더 없는 기쁨을 느낀다.

셋째, 사람들과 깊게 교감하고 소통할 때 즐겁다. 피상적인 종류의 대화가 아니라, 정말 나와 전혀 다른 종류의 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고, 나라는 사람을 열어젖혀 누군가를 맞이할 때 느끼는 그 환대의 즐거움이 있다. 홀로 사색에 잠기는 것 역시 좋아하지만, 나는 평생 골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며 살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소통하고, 함께하는 삶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운동도 사람들과 함께하는 복싱과 크로스핏을 경험하며 더 즐거웠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궁 속에 있지만, 이 세 가지 확실한 감각들을 생각했을 때, 몸을 움직여 땀 흘리고 무언가를 창작하는 여정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뭉툭하게 내 안에 담겨있던 생각은 어느 날 친구를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툭 "나 세계 여행 떠날 거야"하고 튀어나오고 말았다. 애초에 난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도 아니고, 솔직히 여행을 내가 좋아하는지 조차도 모르겠다. 그저 앞으로 내 삶의 광경이 바뀌기를 바랐기 때문에, 내가 몸 담고 있는 세계를 바꾸고 싶었다. 이 여정이 어디서부터 시작될지도, 얼마나 지속될지도, 어디서 마침표를 찍을지도 모른 채 모든 게 막연했지만, 막상 그 말을 뱉고 나니 뭔가 제자리에 맴돌며 막혀있던 생각의 경로가 탁 하고 뚫린 것 같았다. 막연하게 어디서 들어봤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떠올랐다. 막연히 매일 20km에서 30km의 거리를 30일 동안 홀로 걸으며,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혼자 사색하며 뭔가를 창작해 내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내 머릿속에서 그 여정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넘어, 삶에서 닿아본 적 없는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지금 내가 삶에서 느끼고 있는 명료한 감각들의 조건을 충족하는 일 같았다. 이게 내 인생을 어디로 이끌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것은 굳이 굳이 하고 봐야 하는 성격의 인간이라, 그저 지금 이것을 해보고 싶을 뿐이다. 젊고 튼튼할 때, 언제 또 이렇게 긴 시간을 투자해 모험을 떠날 수 있을까. 돈이야 앞으로 벌면 되지 하고 미래의 나에게 맡겨 놓고 말이다. 안 좋게 말하면 대책이 없고, 좋게 말하면 용기 있는 발상이랄까. 다만, 지난 몇 년의 시간을 통해 배운 것들을 토대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조금은 더 나은 버전의 나로 성숙해지기 위해 이 도전에 몇 가지 변화구를 줘보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것들을 더해보련다. 첫째, 조금은 더 계획적이여 보는 것이다. 예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그리고 미래에 대한 백업 플랜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따져보자. 지금 이렇게 적긴 했는데, 솔직히 혼자서 잘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둘째, 나를 애정하는 주변친구들의 조언을 보다 열린 마음으로 들어보고, 그중 내게 정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들을 수용하고 적용해 보려 한다.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순례길은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까?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에 내심 막연한 기대감을 안고 있지만, 사실 드라마틱한 인생의 변화가 없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나의 기대감을 은근히 조절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이 얼마나 특별할지도 솔직히 딱히 미지수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난다거나, 서른의 기점에서 잠시 멈춰서 삶을 돌아본다거나, 퇴사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간다거나, 하는 일들은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브런치에 산티아고 순례길만 검색해도 700개가 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 언뜻 여기저기 검색만 해봐도 관련하여 이런 저런 글들, 브이로그, 뭐 그런 것들이 이미 정말 많다. 돌연 이런 여정을 떠나는 일 자체로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도전을 한다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특별할 뿐이다. 그리하여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수상 소감에서 인용했던 마틴 스콜세이지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따라, 뭔가 특별한 것을 창작해 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그저 막연함에서 시작된 나의 이 여정을 시작점에서부터 차곡차곡 기록해보려 한다. 나그네처럼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생, 내가 택한 방향이 앞인지 옆인지 뒤인지 어딘지 모르겠지만, 어디론가 용기 내 움직여보련다. 그게 인생 아니겠소? 하고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조금은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책에서 봤는데, 나무의 성장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들뢰즈의 이론에 의하면, 이는 이른바 수목형과 리좀형으로 나뉜다. 수목형 나무는 뿌리-줄기-가지로 이어지는 수직적이고 선형적인 방식으로 성장하는 나무다. 성장에 위계질서를 갖고 한 방향으로 명확하게 자라나며, 경쟁적이다. 반면 리좀형 나무는 고구마나 잔디처럼 땅 속에서 수평적으로 뻗어가는 뿌리 구조에 기반을 둔다. 여기에는 시작과 끝이 없고, 어디서든 연결되고 확장되며, 모든 요소가 서로 평등하게 또 다양하게 연결되는 방식으로 성장한다.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발전하거나 변화할 수 있다. 이걸 보자마자, 성장이라 하면 나도 모르게 왜 꼭 위로 높게 나아가는 이미지만을 생각해왔다 싶었다. 중심 없이 수평적으로 퍼져나가며 성장하는 고구마 줄기를 떠올리며, 이것도 성장의 한 방식일 수 있구나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나의 삶 속에서 궁구할 성장은 바로 이런 모습이구나 생각했다. 예측불가능하게 끝없이 연결되고 확장되는 리좀형 나무와 같은 성장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지금 나는 바닥에 뿌리 박혀, 위가 아닌 어딘가로 뻗어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세계에서는, 마치 수목형 모델처럼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고, 내가 직면한 모든 것들을 내 통제 하에 잡아두려 무던히 애써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부터 시작될 나의 앞으로의 모든 인생의 여정에서는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 오로지 나의 체력을 단련하고 통제하는 일 외에, 내게 일어나는 모든 우연을 사랑하려 노력해보고 싶다. 예전부터 '프로젝트'라고 하면 뭔가 늘 새롭고, 설레는 기분을 주는 것 같아서 '프로젝트'라는 말을 참 좋아했다. 뭔가 작당모의하는 기분도 들고, 어감 자체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끝이 있는 무엇인 것 같아서 일시적으로 몰입감을 높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인생도 나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나 그런 설레는 마음으로 내 삶을 대하고 싶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현재에 몰두하고 싶다. 정답이라고 여겨왔던 내 삶의 지난했던 한 챕터를 지나, 내 인생 2막, 새로운 항해를 출발한다. 그리하여 앞으로 시작될 이 여정에 이름을 붙여본다. Project Hit the Road 프로젝트 힛 더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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