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격이 급한 네가 아니 내가
응급실에서 확인한 심장소리(6주 차)
임신 사실을 알고 처음 맞은 추석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처음 맞는 명절이기도 했다. 원래대로면 명절 전날 시댁에 가서 음식도 같이 하고, 자고 일어났겠지. 그러고 나면 대부분의 부부들이 그렇듯 다음날 큰집에도 가고 산소에도 들렀을 것이다. 하지만 임신 5주 차에 약간의 피 비침이 계속되자 망설여졌다.
다행히 임신 사실을 아시고 시댁에서도 기뻐하시고 상황을 이해해 주셔서, 남편과 나는 명절 당일에 출발할 수 있었다. 국토를 타는 바람에 야속하게도? 휴게소 한 번을 들르지 못하고 직행했더니 오히려 고속도로 같았달까. 서둘러 도착한 큰집에서 나는 시엄마와 시엄마의 형님들께서 차려주신 밥을 어찌어찌 넘겼다. 다들 분주하신데 새아가 둘(나 말고 큰집에도 만삭인 며느리가 있었다.)은 앉아서 눈동자만 열심히 굴리는 모양새였다. 오늘따라 입덧이 좀 잠잠했지만 계속 먹고 앉아있을 수 없으니 눈치껏 일어나보기도 했다. 그래 봐야 숙련된 어머니들 사이에서 며느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눈동자 굴리기밖에 없었다.
운전을 내가 한 것도 아니고, 종일 앉아서 전을 부친 것도 아니었으니 잠은 좀 덜 잤어도 몸은 멀쩡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정에 와서 한숨 자고 일어나자마자 보게 된 새빨간 피가 나를 뒤집어 놓을 줄이야......
임신 초기 갈색 피, 갈색 냉 등은 흔한 일이라고 해서 최대한 가볍게 넘겨왔다. 물론 이런 이유로 이번 추석도 느지막이 찾아뵙긴 했지만... 어쨌든 몸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변기에서 본 새빨간 피와 약간의 덩어리는 화장실과 대조되는 색깔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아예 집에 있었어야 했나 하는 후회부터, 다니던 병원에 전화를 해봐야 할지, 세종으로 당장 내려가야 할지 오만가지 생각이 눈과 코로 동시에 흘러나왔다. 울면서 같은 병원을 다니는 지인에게 병원 응급실 연락처를 물어봤다가, 인터넷 사례를 찾다가를 반복할 때쯤 방에 엄마가 들어왔다.
진짜 잘못됐을까 하는 걱정에 “만약에 잘못됐으면 어쩌지...” 하는 말도 입 밖으로 내놓지 못했다. 병원을 가보고 싶으면서도 가보기 싫은 상황, 혹시 마주할지도 모르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자꾸만 나를 압도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아이를 생각보다 더 많이 바라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이렇게는 불안해서 못 버틸 테니 근처 산부인과 응급실에 가보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도, 응급실에서 진료를 기다리면서도 울컥하는 마음을 흘렸다가 참아냈다가를 반복했다. 오죽하면 남편은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들고 나왔다. 응급실에서 하는 피검사와 문답 검사가 끝나고 산부인과 당직 선생님이 내려왔다. 당직의 선생님은 불편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자궁경부, 질 초음파 등을 한참 동안 봤다.
응급실은 비교적 한산해서 밖이 조용했지만, 검사실 내부를 채운 기계 소리와 긴장감은 그만큼 더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혹시나 나한테 적당히 할 말을 고르고 계신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숨을 참을 때쯤, 돌려준 모니터에 비친 아기집을 보자마자 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기는 이상이 없고요, 아이고 왜 울고 계세요...”
휴지를 건네주며 걱정스럽게 물으셨다. 다행스러워서 그렇다는 말을 하니 의사 선생님도 한층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응급실 기계라 들릴지 모르겠네요, 아가 심장도 뛰고 있거든요. 들려드리고 싶은데..... 아직 못 들어보셨죠?”
예정대로면 명절이 지나고 남편과 함께 들으러 가려던 참이었다. 이마저도 못 듣게 될까 봐 그렇게 울었던 건데. 몇 번의 클릭 후에 ‘들리세요?’와 정적이 두어 번쯤 이어졌을까. 어느 순간 기계 소음과 구분되는 확실한 심장소리가 들렸다.
“방금 들었어요!”
“여기 지금 깜빡거리는 곳이 아가 심장이에요. 아기집도 이상이 없고, 아기도 잘 크고 있는 거 같아요. 출혈은 자궁경부가 좀 헐어있어서 생겼고요. 큰일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겪으실 수 있는 일이에요. 소독해드렸으니 다니시던 병원 외래 보실 때 말씀드려보시면 좋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제가 뭘 한 게 아닌걸요. 초기에는 피가 좀 비칠 수 있어요. 자궁경부가 약할 수도 있고, 다른 여러 이유들 때문인데 보통은 태아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아요. 다만 출혈량이 패드 두 개를 넘길 정도다 싶으면 무조건 병원에 오셔야 해요. 정리하시고 일어나시면 밖에서 안내 도와드릴 거예요.”
살면서 응급실에 올 일은 몇 번 없었지만, 바쁜 응급실임에도 자세한 설명과 안내에 너무 감사했던 순간이었다. 보통 응급실은 출혈이 있어서 온 환자의 상태가 더 중요한데, 아기에게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는 사실은 나중에 간호사인 친구의 말을 듣고 알았다. 기다리고 있던 남편과 함께 택시를 기다리는 순간에야 정신이 좀 드는지 날이 좀 추운 거, 배가 고픈 것과 같은 내 삶이 느껴졌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내 삶을 잃게 될까.
“쑥쑥이가 잘 크고 있다고 빨리 자랑하고 싶었나 봐.”
“그런가 봐 ㅎㅎ 성격이 급한 친구인가... 두 번은 안 이랬으면 좋겠어...”
진짜로 성격이 급한 건 나였으니 울면서 달려갔겠지. 자궁은 앞으로도 계속 커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피 비침은 언제든 있을 수 있겠지만, 다음에는 좀 더 침착해야겠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은 침착하기 힘들겠지만 이 사례로 조금이나마 진정하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겪은 불안과 두려움을 비슷하게 혹은 더 심하게 겪을 텐데... 희망 사례 하나라도 되뇌며 갈 수 있길 조용히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