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어린이집 방학은 약 2주- 맞벌이 등으로 부모 모두가 온전히 쉴 수 없는 가정을 위해서 다행히 선생님들이 번갈아 쉬어주시는 터라, 방학기간동안 아이를 보내도 무방하다. 그런데 왠지 하루 쯤은 아이를 집에 데리고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담임선생님이 없고, 사람들 모두 마음이 방심해지기 쉬운 '금요일' 하루 정도는 휴가를 내서 아이와 노는 편이다. 그렇게 시작된 금요일의 휴일-
아이를 위한 미션 하나, 그리고 나를 위한 미션 하나로 모처럼 평일 '휴가'에 아이를 기쁘게할 신선한 계획은 더 이상 얹어지지 않았다. 다음달 가족여행을 위한 '여권 갱신'이 나를 위한 미션, 그리고 감기약이 똑 떨어진 아이의 '소아과 방문'이 아이를 위한 미션이다.
셀프 여권사진을 찍으면 그다지 비용도 안 들고 좋다는데, 어째 '여권을 갱신하자!'라는 생각만 하고선 세부 디테일들은 홀랑 잊어버렸다. 남편이 "사진 다시 찍어야 되잖아? 시청 근처 허허벌판이던데" 라는 말에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겠지...."라고 호기롭게 말한 후 시청에 도착! 다행히 <여권사진 찍는 곳>이라고 대문짝만하게 게 글씨가 써있는 곳을 발견하고 기계의 눈에 내 얼굴을 맡겼다. 본판 불변의 법칙이지만, 기계가 찍어주니 더욱 맨얼굴 그대로 나온 사진에 살짝 기분이 상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화를 낼 수 도 없는 노릇- 돈을 지불하고 갱신 완료, 다시 평일날 재발급 여권을 가지러 올 시간은 없을테니 등기우편으로 받을 수 있게 설정해둔다.
2개월의 여유기간을 남겨두고 용도가 없어진 여권에 찍혀있는 도장들을 휘릭휘릭 돌려서 확인한다.
작년에는 비행기를 한 번도 타지 못했다. 작년 초에 갑작스럽게 회사를 나오게 되었고, 4월에 간신히 들어간 회사를 다시 6월에 나왔고 다시 '취준생' 생활을 이어가다가 8월에 덜컥 지금의 회사에 입사, 어리버리 적응하면서 한 해를 다 보냈기 때문- 멀고 화려한 곳은 아니더라도 한 해에 한 번쯤은 쌈짓돈을 털어서 가족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었는데- 아, 가만보니 작년에는 국내를 포함 '여행'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직장인이란 하루씩 벌어서 한달을 모아 그걸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니, 갑자기 '수입'이 끊어지면서 주머니속이 빈 상태를 경험하고 그 경험은 '불안'이 되어 여행을 계획하는 여유로운 마음을 싸그리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그동안 해온대로 열심히 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네 잘못이야'라는 경험을 연달아 하게되면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점점 사라지고 불안해진다. 20대, 한창 도전정신으로 가득찼을 때라면야 "괜찮아, 배워가는 과정이니까 다시 시도해보면돼"라고 말 할 수 있지만, 오롯이 내 결과를 내가 감당해야 하는 나이임에, '내가 그동안 잘못 살아온걸까?'라는 자괴감에 휩싸이던 때가 작년이었다.
깜깜함, 자괴감, 헤쳐나갈 방법이 없다... 그래서 생각했던 방법이 십여년만에 용하다는 '철학관'에 갔던 것이었다.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듣고 어떤 책을 휘리릭 넘기던 아저씨는 "28세부터 42세까지 되게 힘들고 안 좋았어, 마지막 해인 올해는 뭘 해도 안 될 해야" 라는 말로 사주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가장 빛나고 가장 활동적이어야 할 시기들이 제일 안좋았다는 말에 '뭐야, 내 인생 왜이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현재 처해진 상황이, 나 자신의 잘못으로만이 아닌 '그저 운이 그렇다'라는 말에 적지 않은 위안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힘들긴 했지만 28세부터 41세까지... 뭐 그렇게 죽을 정도로 힘들었던 것도 아니고, 경력도 쌓고 돈도 벌고 건강하게 이것저것 다 하면서 살아왔으니, 괜찮은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함께 했다.
'밤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새벽은 더 밝게 다가온다는데, 이제 좋아질 일만 남았으니 아자아자 힘을 내자!'라는 생각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더랬다.
사주아저씨가 '이제 좋아질 일만 남았다'고 하는 새해가 밝았다. 음력 설 기준이어야 하니 아직 20여일은 더 버텨야 하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게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2월에는 가족여행부터 잡혀있으니 이제 더 괜찮아질 것이다.
더 잘될 거고, 더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믿는 수 밖에 없다.
아, 소아과도 잘 다녀왔다.^^ 근데 이거 일긴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