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거래

015. 중고를 사는 이유

by Defie

사무실로 한 더미의 책을 배달받았다. 천천히 자격증 하나를 따 볼 생각을 하고 일단 관련 카페와 카톡방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자료 수집을 하던 중, 최근 시험교재를 샀지만 공부를 잠시 미루신 분이 책을 저렴하게 내놓는다는 글을 보게 된 것이다. 다들 알아보고 구입했을 테니 큰 고민 없이 저 뭉텡이를 사면 되겠다는 생각에 접촉, 문자 흥정부터 시작했다. 택배 포함 5천 원깎자는 내 제안에 택배 착불로 협의. 그다음은 물건과 지불의 시기 조절이다. 선입금 후 송장을 보내겠다는 상대방의 제안에 일단 반송금 후 송장확인, 그다음 반지불 제안. 선입금 고수, 내 쪽은 아무것도 없이 선입금은 무리... 직거래를 제안받았으나 거리가 만만치 않아 그것도 거절했다. 생판 모르는 서로를 어떻게 믿겠는가? 달걀과 닭의 관계 같은 거라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난감한 상황. 중고책이라도 책값이 10만 원 남짓이니 적은 금액도 아니다. 조금 양보해서 명함 교환 요청, 명함은 없고 이름, 전화번호와 교재 사진 인증만 가능하단다... 그냥 관둘까도 생각하다가 움직인 김에 사자 싶어 일단 더치트에 전달받은 이름과 계좌번호가 사기 전력이 있는지 확인, 그리고 꽤 많은 책이지만 사무실로 받기로 했다. '로펌'이라고 쓰여있으니 아주 작게나마 무언의 압박이 되기를 기원하며


예전에는 안 사면 안 샀지 중고거래는 하지 않았었다. 세상에 나와 날 위해 고이 기다려준 신상을 뜯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인지 중고물품을 산 적도 많지 않다.


그런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는 두 가지 육아와 혼돈의 시기에 접하게 된 미니멀 라이프였다. 아이를 키우게 되면 육아는 템빨 이란 말처럼 굉장히 많은 것들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때는 절실히 필요하던 것들이 그 시기만 지나면 하등 쓸모없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니 (거기다 우리 아이는 물려줄 동생도 없다) 새로 사는 것보다 누군가 깨끗하게 잠깐 쓴 물품을 사는 것이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발로 들어간 회사를 내발로 나오고 난 뒤 밀려온 자괴감의 시기, 되는 것이 하나 없다ㅡ생각할 때 그나마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주변정리였기에 수납정리를 배우다가 미니멀 라이프라는 개념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물건에 휩쓸리지 않는 것, 비우는 것, 그리고 꼭 필요한 것만 사고 쓰레기를 줄이면서 내 후세에게 물려줄 지구를 위하는 것- 그 안에 효용이 있을 때까지 물건을 재활용하는 것이 들어있었다. 새것을 만나는 잠깐의 두근거림보다 재활용을 하고 세이브하는 돈이 더 효용의 가치가 있다. 어차피 새것도 사용한 순간 헌것 이 되잖아? 생각이 조금 바뀌니 중고물품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퇴근길 백팩 안에 그리고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는 에코 백안에 책을 나눠서 넣었다. 꽤나 무거워서 허리가 휘청댄다. '그냥 집으로 시킬걸...'살짝 후회했지만 '아니야 그래도 사무실로 시켜서 더 확실하게 잘 보내줬을 거야'라고 나를 격려한다.

이제 공부할 책도 생겼으니 진짜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다짐한다. (이 다짐을 며칠 뒤 또 하고 있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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