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박물관

025. 읽은 다음에는?

by Defie

연휴 마지막날, 아이와 뭘 하고 놀까 하다가 또 키즈카페에 갈 수는 없어서 용산에 있는 한글박물관에 가 보기로 했다. 아이가 요새 한글에 눈을 뜬터라 세상이 글자와 글자아닌걸로 보이는지 끊임없이 글자를 읽어대기 때문 - 입장료 없음, 한글 놀이터도 있다고 하는데, 얼마나 놀릴수 있으려나~ 반신반의하면서 오전에 길을 나섰다.

마침 다들 서울을 떠났는지 도로도 한산했다.


아이의 한글습득은 어린이집 하원 후 아이를 봐주시는 친정엄마의 솜씨, 그리고 나 또한 엄마에게서 한글을 익혔다. 그 시절 대부분의 집이 다 그랬지만 2남3녀중 끝에서 두번째인 엄마는 공부는 잘하셨다는데 원하는 데까지 학교를 다니시지 못하셨다. 그 아쉬움이 자식에게로 향했고 배우는것도, 칭찬받는 것도 좋아하는 다소 착한아이 콤플렉스이자 장녀였던 나는 엄마의 기대를 덥석덥석 받아 먹었다. 그렇게 한글을 뗀게 4살, 그 이후로는 닥치는 대로 글자들을 읽어댔다.


버스를 타면 엄마옆에 앉아 차창밖으로 보이는 간판과 글자들을 하나씩 읽었고 엄마는 그런 나를 기특한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세상은 글자로 가득 차 있었던 반면 우리집에는 책들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친구집에서, 사촌언니네 집에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아이에게 맞는 책들을 모두 읽고 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어른들의 책에도 손을 뻗쳤다. 삼국지, 초한지 같은 고전의 명작들도 있었지만 가십이 가득한 잡지나 아이는 전혀모르겠는 어른의 사정이 들어있는 글도 만났다. 가장 손쉽게 만날 수 있던 곳이 바로 엄마를 따라갔던 미용실 한켠의 선데이서울 같은 잡지들... 이야기 삼매경에 푹 빠진 아줌마들 틈바구니에 섞여서 뜻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왠지 죄책감이 드는 이야기들을 읽었다. 뭐든몰래 하는게 재미있듯 그렇게 야금야금 불량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던 걸까...

어쨌든, 10살정도 위인 사촌 언니의 할리퀸로맨스와 '다락방의 꽃들'로 대표되는 금기된 사랑 이야기들을 모두 섭렵한 것이 중학교때.


그 다음에는 더 이상 읽지 않고 무언가를 써댔고 책보다는 영화, 그리고 교회에 빠져서 지냈다. 고3때 딱 일년을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에 갔고, 이것저것 뻘짓을 하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그리고 다시 한바퀴를 크게 돌아 몇 년을 실컷 읽은 후 지금은 매일매일 쓰고있다.

이렇게 써보고 나니, 읽는 것도 쓰는것도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구나... 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한글박물관은 생긱보다 시시했다. 큰 기대를 했던 놀이터에서 아이는 한시간을 채 놀지 못했다. 더군다나 아이를 따라다녀야 하는 부모들을 위한 앉을 공간은 턱없이 부족해서, 그다지 젊지 않은 부모의 다리는 점점 아파오기 시작했고, 한시간 반 남짓을 버틴 후, 근처에 맛집이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아이는 이제 어떤 것들을 읽게될까? 우선은 좋은 이야기들만, 희망찬 이야기들만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 조금 힘들때, 누군가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생길때,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는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요즘 더 많이 느낀다.

나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나자신 밖에 없고, 그 중 가장 쉬운 방법은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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