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ng Her Back (2025)
어떤 공포가 가장 큰 공포일까? 점프 스케어? 고어? 귀신과 저주? 이해할 수 없는 살인마?
이 영화에서 말하는 가장 큰 공포는 감정적 공포이다. 2020년대에 들어와 공포의 주된 테마는 실체가 없는 미지의 공포를 보여주는 것에서 너무도 정확히 잘 알고 밀접한 주변과 나 자신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 가져다주는 이해 하는데도 불가해의 영역에 여전히 머물러있는 공포로 옮겨왔다.
의문의 VHS 비디오, 레트로 컬트, 끔찍한 신체훼손의 이미지... 이것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뿐 무섭지는 않다. 진심으로 무서운 건 딸을 잃고 여전히 상실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평범한 싱글맘 '로라'(샐리 호킨스)다.
그 여자는 그냥 슬픈 여자가 아니다, 슬퍼서 미친 여자다.
로라는 황홀한 듯 말한다, We can bring her back.
어떤 영화를 보면 이런 말이 알맞다. “그 여자 미친 여자 아니에요, 슬픈 여자예요” 하지만 브링 허 백(2025)의 로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둘 다'이다. 아동복지국 상담사로 20년을 근무하다 딸을 잃고 위탁가정을 운영하는 그녀에게, 아버지의 사고사로 남매 '앤디'(빌리 바렛)와 '파이퍼'(소라 웡)가 도착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화는 초반부터 쎄한 분위기를 관객에겐 보여주고, 등장인물들에겐 불편하게 감춘 채 진행된다. 여아인 파이퍼만을 바란 것,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며 앤디만을 가려버린 것, 다른 위탁아동이 있다면서 제대로 소개도 시켜주지 않는 것 등등. 특히 박제된 애완동물을 소개해주는 장면은 로라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흔히 공포영화의 클리셰 같은 하위 장르에 Psycho-biddy라 불리는 미친-할머니 장르가 있다. 영화 초반부의 장면들을 보면 로라도 전형적인 Psycho-biddy의 하나로 보인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다.
문제는... 로라가 보통의 Psycho-biddy, 그저 슬퍼서 미친 게 전부가 아닌 여자라는 것이다.
로라는 실제적 사보타주와 감정적 가스라이팅으로 두 남매를 갈라놓으려 한다. 이 과정이 영화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이었다. (징그러운 장면은 차치하고서라도.) 앤디의 죄책감을 계속 상기시키면서, 파이퍼에겐 한없이 상냥한 천사 같은 로라. 위탁아동이라 소개한 올리를 방에 가두는 로라. 남매를 떼어놓고 파이퍼에게 집착하는 로라.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영화 제목이 스포일러 자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지막 장면은 김혜순 시인의 시 <자장가>가 생각났다.
자장가─서른 이레
아이의 엄마가 죽은 아이를 안고 얼렀다.
자장가를 불렀다. 자장가의 내용은 이랬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 얼른 죽어 편해지자 더 이상 울지 말자.
아이의 엄마는 방 한가운데를 파고 아이를 묻었다.
천장에도 묻었다. 벽에도 묻었다. 눈동자에도 묻었다.
엄마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지만 아이의 이름은 알았다.
상실이란 커다란 고통이자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너무 가까운 아픔이다. 이렇게 가깝고 잘 알 수 있는 감정, 이만큼 미칠 수도 있을 법한 감정, 그러나 여전히 불가해한 그 감정. 이런 것들이 <브링 허 백>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요소이다. 사랑하는 아이의 부패한 시체는 누구나 두려워하는 시체가 아니다. 아이의 엄마는 죽은 아이를 안고서도 영원히 자장가를 부를 수 있다. 눈동자에도 묻었으나 죽어서 편해졌냐고 묻지만 죽지 못한 그녀는 미쳐간다.
남편을 잃은 아내는 과부, 아내를 잃은 남편은 홀아비, 부모를 잃은 아이는 고아, 자식을 잃은 부모는 지칭하는 말이 없다는 말이 있다. 로라는 이 말처럼 상실을 더 견딜 수가 없어 자식 잃은 엄마인 자신을 '미친 여자'로 지칭하게 되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여전히 무서운 이 상실의 감정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샐리 호킨스의 열연도 설득에 한 몫한다. Bring Her back. 우리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을 겪는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Bring '─' back을 택할 것인가. 이 물음은 영원히 답을 내리지 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