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2024)
"달이 빛난다 하지 말고 깨진 유리에서 나는 빛을 보여주라"는 말을 아는가. 러시아 희곡가 안톤 체호프의 유명한 명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난다 상상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대도시에 상경해서 커리어를 쌓아가며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일도 이런 빛나는 상상에 포함될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렇게 찬란한 삶은 나오지 않는다. 인도의 몬순 시즌의 더더욱 어두침침하고 축축한 뭄바이 속 상경한 이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여기 뭄바이가 고향이 아닌 세 여성이 있다.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프라바'는 발신인이 없는 밥솥선물을 받고 그것이 지금은 연락이 끊긴 남편으로부터 온 것인가 싶어 그와의 재회에 대한 열망이 자신에게 있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그녀의 룸메이트이자 간호사로 일하는 '아누'는 자신의 집안은 힌두교지만, 무슬림 남성과 사랑에 빠져 아는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을 찾기 위해 밤거리를 헤맨다. 병원 식당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 '파르바티'는 남편 사후, 거주를 증빙할 서류가 없어 재개발로 집을 잃고 뭄바이에 남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하다 고향으로 돌아갈 지에 대한 기로에 놓인다.
극이 진행될수록 꿈꿔왔던 대도시의 삶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드러난다. 애초에 한번 주선된 만남으로 이제는 연락조차 되지 않는 남편과의 삶을 그리며 좇기보다 사람들을 돕는 간호사 일을 하고 싶은 프라바, 부모님의 기대와 압박에서 자유롭게 사랑하고 싶은 아누, 남편과 살던 집에서 현재의 삶을 계속 살고 싶은 파르바티. 그들은 모두 '뭄바이'라고 붙여둔 어떤 꿈과 이상을 꾸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 번쯤은 대도시와 같은 다른 곳에서의 삶을 꿈꾼다. 그곳에서 지금과 달리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더 큰 기회를 잡을 것 같고, 더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상상한다. 하지만 삶은 어디서든 삶이다. 극 중 프라바와 아누, 파르바티가 마주하고 있는 뭄바이는 꿈이 실현되는 무대가 아니라 버텨내야 할 전장에 가깝다.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의 부재, 무의미한 혼인제도에 묶여 견뎌야 하는 외로움, 계급과 종교, 다른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현실의 벽들. 이런 것들이 극 중후반부까지 몬순의 날씨와 함께 그려진다.
파르바티의 고향인 바닷가 마을로 세 사람이 함께 떠나는 여행은 마치 몬순의 뭄바이와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환하고 밝은 이곳 또한 빛이라 상상할 공간이 되어준다. 이들은 대도시에선 찾을 수 없던 그들의 욕망과 꿈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찾는다. 이것은 단순한 일상 탈출이 아니다. 오히려 도시로 돌아가야 할 현실이 있기에 더욱 소중한, 찰나의 자유다.
영화는 현실의 무게를 비참함으로 치환하지 않는다. '달이 빛난다' 하지 못해 좌절하는 일 대신 '깨진 유리가 빛나는 듯한' 평범한 사람 하나하나가 엮여 피어나는 우정과 연대의 감정을 보여준다. 세 여성은 각자의 상처와 한계를 안고 살아가지만, 서로에게 작은 빛이 되어준다. 프라바의 조용한 배려, 아누의 생기와 활동력, 파르바티의 연륜과 지혜. 이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따뜻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진정 빛나는 것이다.
빛은 우리 바깥, 어딘가 멀리 꿈의 장소에만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것이 아니다. 빛은 우리 안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고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보여준다. 꿈에 그리던 상상한 삶과 목표가 좌절되고 차갑고 음울한 현실이 우리를 짓눌러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빛이 될 수 있다. 깨진 유리조각 같은 일상의 작은 순간들에서 반사되는 빛. 상상하던 빛보다 반짝이는 진짜 빛이다.
상경해 잠들려고 누웠는데 내가 상상한 도시는 발밑에 없고 허공에 붕 뜬 기분일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의 온기가 얼마나 태양빛과 같은지 느껴지는 시가 떠올랐다. 안미옥 시인의 <썬캐처>이다.
썬캐처
매일 밤 자기 전 내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오늘은 어떤 형체로 살았던 걸까. 표면이 거친 돌로 된 심장으로 뛰고 있던 걸까. 막다른 벽. 컵 속에서 깨진 물의 파편처럼 놓여 있었나. 도로 위 뒤집힌 검정 우산 속으로 비가 쏟아진다. 어려움이 지속된다.
오늘 나는 어떤 발로 서 있었나.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왜일까. 유리발로는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단단하고 투명한 눈동자. 내일은 다른 발이 되어도 좋다. 발을 깨뜨려야 한다고 해도 좋다. 내가 어디에 서 있던 것인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소중하게 다뤄야 해. 무엇을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걸까. 잠드는 일과 깨어나는 일 사이에서, 아니 깨어나는 일과 잠드는 일 사이에서. 그때 만난 모든 사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구별해볼 수 있다. 한 뼘의 사랑과 한 발자국의 위로가 얼마나 커다랗고 깊은지.
깨어나선 내가 무엇이 될지 생각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넘어가보려고 할 때, 불에 탄 자국만 남은 문틀을 보게 되겠지만. 지금 얼굴에 닿은 빛은 얼마나 먼 시간으로부터 쪼개져나온 태양의 손끝일까. 결국 닿게 되는 것이라고.
오늘은 여러 방향으로 찢어져 좀더 넓은 곳까지 필럭이는 천. 마음도 손도 최대치로 길어져 기울어진 웅덩이까지 가닿는 끝. 듣는 사람의 두 귀는 말린 귤을 닮았다. 이제는 축적된 시간을 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하는 게 어려워요" 영화 오프닝에는 뭄바이의 평범한 일상을 담은 영상과 뭄바이로 상경한 사람들의 실제 인터뷰 녹취가 흘러나온다. 몇 년을 살아도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 도시에서, 고향으로도 꿈꾸던 삶으로도 쉬이 옮겨지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것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영화는 우리 모두가 빛을 상상할 수 있는 힘으로, 빛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반짝인다. 정신없는 인구밀도와 밤에도 환한 네온사인, 끝없는 공사현장과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잠들지 않는 대도시가 품고 있는 것은 우리가 상상했던 찬란한 빛이 아니라, 그런 일상들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속에서 조용히 반짝이는 소박한 희망들이다. 한 뼘의 사랑과 한 뼘의 발자국의 위로, 끝까지 들어주는 두 귀, 얼굴에 닿는 듣는 사람의 두 눈, 빛보다 반짝이는 것. 그것은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이 건네는, 결코 비참하지 않을 삶에 대한 긍정과 사람 내면에서,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빛나는 희망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