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볼드 뷰티풀(2025)
몇 년 전, 유행한 책 제목이 생각난다. 『미움받을 용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아마도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그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영화 <빅 볼드 뷰티풀>은 마음을 닫은 사람들에게 "Big Bold Beautiful Journey"를 가시적으로 선사하는 영화다.
"Why are you still single?"
"Are you ready for a big bold beautiful journey?"
언뜻 보기에 연관이 없는 이 두 질문은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주인공들에게 주어진다. 당신은 왜 싱글인가요? 위대하고 대담한 아름다운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었나요? 사실 연애 프로그램이라면 더 생각해볼 의미도 없었겠으나, 영화 <빅 볼드 뷰티풀>은 한층 더 깊은 인간의 심리를 끌어온다. 바로 다시 자신의 감정의 벽을 부술 용기를.
"이번 결혼식에 혼자 가니? 마음을 열어라, 인생이 편해진다, 데이빗."
"아빠, 전 혼자가 편해요."
주인공 데이빗은 지인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서며 부모와 통화를 한다. 아버지의 알 수 없는 말을 대충 대꾸하고는 차를 렌트해야할 상황이 된다. 그렇게 도착한 어딘가 수상한 렌탈샵. 오디션을 보는 듯한 스튜디오.
데이빗은 렌탈샵의 사람들이 시키는 문장을 읊다가 따진다. 내가 배우도 아닌데 왜 대사를 해야 하죠?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온다.
"우린 누구나 연기를 하잖아요. 연기 속에는 결국 진실한 순간이 있어요. 우리는 진실에 닿기 위해 연기를 해야 해요."
이런 아리송한 렌탈샵에서 그는 결국 이상한 GPS가 달린 차를 빌린다.
그는 결혼식에 도착해 새라에게 온통 눈을 뺏기지만, 춤추자는 말을 거절하고는 후회하며 떠난다. 하지만 새라 또한 수상한 GPS가 달린 차를 렌트 중이었고 둘은 재회해 GPS가 안내하는 '위대하고 대담한 아름다운 여행'을 떠나게 된다.
GPS가 안내하는 곳에는 기묘한 문이 서 있다. 그 문을 통과하면 각 그들의 과거 순간으로 가게 된다.
각각의 문을 통과할 때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과거 속 결정적 순간들을 다시 마주한다.
데이빗의 외로움과 괴로움, 새라의 후회와 죄책감. 그리고 그 안의 어떤 기쁨들과 소중했던 순간들.
서로의 과거를 함께 겪으며 두 사람은 점차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깨닫는다.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순간들은 단순한 재현이나 시간여행이 아니라 치유를 위한 연극의 순간이다. '진실에 닿기 위해 연기를 해야한다'라는 기묘한 말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진실에 다다른다. 낱낱이 해부된 감정의 상처 앞, 서로의 모습을 본 둘은 서로를 견디기 힘들다.
집에 가고 싶던 둘은 각기 집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자기 상처의 시절을 어루만지게 되고, 영화 내내 푸른 계열의 옷을 입던 데이빗과 붉은 계열의 옷을 입던 새라는 서로의 색상을 입으며 재회한다.
이 여정은 단순한 연애를 넘어, 회피형인 두 사람이 자신 안의 갇힘을 넘어서 상대에게 닿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영화 속, 진실된 자신이 지독한 실패작이라 느끼는 둘이 만나는 모습은 여세실 시인의 시 <실패 놀이> 같다.
실패 놀이
말만 해요 코 깨버릴라니까
이거 주먹 보여요?
굳은살
이거 완전
무자비
알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선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파란색 풍선 하나가 끼여 있다
두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꽉 껴안는다
몸과 몸 사이에서
풍선이
울렁울렁
알죠?
치를 떨며
나 당신의
미쳐버린
끝자락이 되어버릴라니까
모닥불을 피워두고
양말을 널어 말렸다
변방이 좋아서
불 주위로 모여드는 다짐 있다 아니에요?
다리 많이 달린,
한번의 날갯짓만으로도
지린내를 풀풀 풍기는
그 벌레들
내가 싹 다 잡아먹어버릴라니까
걱정 말고
내 위로
완전히 당신을
고꾸라뜨려요
비겁한 당신을
나약한 당신을
벗어나고 싶은 당신을
짜개지고 있는 당신을
잿가루만 남아서
홀로인
당신,
주먹만 한 무덤
쌀 한톨만 한 어둠을 드려요
정확하게
나는 나를 모르고
분명하게
나는 당신을 안아요
터지기 일보 직전에
몸이 너울거리는 그 순간을 기억해요
그리고 처음으로 가요
다시 시작해요
기절초풍
방금 방심했죠?
당신을 향해서
축복을 쏠게요
까치발을 든다
찬 공기는 아래로
뜨거운 공기는 위로
흩어진다
공기가 사람을 불사른다는 거
터뜨리기
흔들기
흔들어 제치기
넘고 싶어요
당신
넘을 수 없는 벽,
그것으로 남아주세요
마주 선 두 사람 사이 끼어있는 풍선. 터지기 일보 직전, 그럼에도 울렁이는 것을 멈출 수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은 데이빗과 새라가 여정을 떠나는 모습 같다. 어쩌면 견딜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눈에 '쌀 한톨만 한 어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로를 '비겁하고 나약하고 벗어나고 싶은 홀로인 당신'으로 보면서도, 옆에서 떠나지 않는다.
결국 '분명하게/나는 당신을 안아'서 풍선은 터졌겠지만, 둘은 '그리고 처음으로 가요/다시 시작해요'처럼 그렇게 새로운 자신으로 마음을 연다. 보통의 낙관은 아니다.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괜찮다는 성장이다. 데이빗과 새라는 '넘고 싶어요/당신/넘을 수 없는 벽,/그것으로 남아주세요'처럼 모순된 마음도 끌어안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영화의 제목 "Big Bold Beautiful Journey"는 결국 이 모순을 껴안는 여정을 의미한다. 위대함(Big)은 자신의 실패와 나약함을 인정하는 데 있고, 대담함(Bold)은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서로를 껴안는 용기에 있으며, 아름다움(Beautiful)은 완벽함이 아니라 진실된 서로에게 다가가는 모습에 있다. GPS가 안내한 여정은 끝났지만, 그들의 여정은 이제 시작일 것이다.
"마음을 열어라, 인생이 편해진다", 엄밀하게 따지면 데이빗의 아버지가 했던 말은 거짓말이다. 마음을 여는 자체로 인생이 편해지지 않는다. 마음은 연 이후, 불편하고 불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을 힘이 생기는 것이다. 세상에 가슴 뛰는 여러 모험이 있을지라도,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될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위대하고 대담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