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함을 사랑하는 법

프랑켄슈타인(2025)

by 명태

인생에 난제가 있다. 바로 자기 자신과 삶.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질문을 잔뜩 안고 의문 많은 생애를 보낸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이 오래된 이야기이면서도 지금의 현실과 밀접하다. 그의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자와 피조물, 삶과 죽음, 아버지와 아들, 인간과 괴물 등의 주제를 다 아우르며 풀어낸다.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이로부터의 계승과 명명보다 자신이 어떻게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 나갈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할까.

무엇이 괴물을, 천사를, 인간을 만들며, 천사와 괴물, 창조자와 피조물은 얼마나 다른 존재일까.

나는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서 이 삶을 살아가야 할까.

이 질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질문이다. 명명과 인식에 따라 본질에 대한 해석이 좌우되는 세상. 명명의 불가지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때는 1857년, 크림 전쟁 이후. 한 덴마크 선박이 북극점을 향해 얼어붙은 바다에 묶여있다. 병사들의 아우성에도 어떠한 희생을 치루고서도 목표를 이루겠다는 선장의 눈에 폭발이 들어온다. 그리고 거기서 한 남자를 구출한다.


그는 바로 '빅터 프랑켄슈타인'. 의족을 찬 채, 이미 쇠약해진 그를 선장실로 데려오니 그를 잡으러 정체불명의 괴력을 가진 괴물이 배를 습격한다. 괴물을 잡으려는 병사들은 말그대로 찢겨져 나가고 우여곡절 끝에 괴물을 침수시킴으로 얼음 위 고요한 밤이 찾아온다.



선장은 어찌 된 일인지 사연을 묻는다. "도대체 어떤 악마가 저런 괴물을 만듭니까?"

빅터는 그것은 자신이라 답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린 빅터는 엄하고 무뚝뚝한 외과의사 후작인 아버지와 사업적 결혼을 한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얼굴은 허영이다, 빅터. 근육에는 영혼이 없다."



집에 거의 오지 않던 아버지는 올 때마다 빅터에게 의학 공부를 시켰고 외우지 못하면 회초리를 들었다. 그의 전부였던 어머니는 자신의 동생 '윌리엄'을 낳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세상의 귀퉁이가 도려내지는 아픔 속 빅터는 어머니를 살려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악에 받쳐 소리친다. 자신은 죽음을 정복하겠노라고. 빅터라는 이름은 정복자라는 뜻으로 이미 그의 운명을 암시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며 아버지 탓을 한다. 빅터는 죽음의 천사에 대한 계시를 보며 자신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매달린다.



결국 아버지도 죽고 동생 윌리엄과 빅터는 각기 다른 곳으로 보내지고 몇 년 후. 빅터는 영국 의학계에서 괴짜가 된다.



"탄생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건 신의 영역이에요. 하지만 죽음은요? 이건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자신의 제명을 앞둔 징계회에서 그는 시체가 전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쇼를 보이며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그런 그를 프로메테우스라 비하며 제안해 온 이가 있었다. '하를랜더 경'은 자신의 조카 '엘리자베스'가 빅터 동생의 약혼자임을 밝히며, 자신이 실험에 비용을 무한 제공하겠다고 나선다.



윌리엄과 함께 영국에 온 엘리자베스에게 반하고 만 빅터. 엘리자베스도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다. 잠시 사랑에 빠진 시간이 지나고 빅터는 자신의 창조물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몰두한다.


전사한 시체들, 처형당한 시체들을 기워서 몸을 만드는 빅터. 그리고 어느 폭풍우 부는 날, 그 짜깁기된 몸에 번개로 전류를 불어넣어 살리는 데에 성공한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크리쳐'는 지하에 머물게 된다.

크리쳐의 탄생 당시 사고로 죽게 된 하를랜더에 의해 윌리엄과 엘리자베스가 그곳에 도착하게 되고, 크리쳐를 발견한다. 크리쳐에게 지성이 있다고 하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무시하고, 빅터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떠난다.

그러나 크리쳐는 죽을 수가 없었다. 빅터는 죽음을 극복한 것일까? 하지만 갑작스레 주어진 탄생만큼이나 죽을 수 없다는 것은 크리쳐에게 비극이었다.



다시금 선장실. 바깥의 소란 이후, 선장실에 크리쳐가 등장한다. 빅터의 이야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하에서 풀려난 크리쳐는 이름도 없이 죽은 병사들의 옷을 걸치며 숲을 방황한다. 그러다 만난 인간들의 폭력, 동물들의 온기, 노인의 지혜 등 그는 어느새 사람의 삶을 동경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늑대의 습격을 보며 느낀다. 사냥꾼들이 늑대를 미워하지 않고, 늑대도 양을 미워하지 않지만, 그저 어떤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죽는구나. 이런 부조리를 마주한 크리쳐는 이후, 노인에게서 많은 지혜를 배우며 자신과 주어진 삶에 대해 궁금해한다.

"삶의 지혜란 용서하고 잊는 것. 흘려보내기로 선택하는 것이라네, 숲의 정령이여."


"창조주여, 제가 부탁했습니까? 진흙에서 나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내달라고?"

노인은 결국 죽게 되었고, 존 밀턴의 『실낙원』 구절이 크리쳐의 입에서 맴돈다. 그리하여 크리쳐는 빅터를 찾아 나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시체들의 누더기야. 죽지도 못해 무자비한 삶의 반복을 겪어야 하는 고통이 마음에 들러붙었지. 고독했어. 인간에게 있는 모든 고통을 멈추는 선물인 '죽음'이 내겐 없었어."

크리쳐는 자신의 탄생부터 죽을 수 없는 처지까지 비통해하며, 자신의 동반자를 만들어달라고 빅터를 찾아 나선다.


빅터는 동생의 결혼식에 와있었다. 여전히 크리쳐를 없애버린 것으로 엘리자베스에겐 냉대받고, 자신은 한쪽 다리를 포함해 많은 것을 잃은 상태로. 그러나 갑작스레 찾아온 크리쳐를 쏘려다 엘리자베스를 쏘고 만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 이것이 사랑의 생애야. 이제 영원이 됐어."

윌리엄도 죽고 엘리자베스도 죽고 만다. 빅터는 크리쳐를 찾아 죽일 목적으로 그를 추격한다. 원치도 않는 삶을 받고 괴물로 살게 한 빅터를 크리쳐는 용서할 수 없었다. '당신이 내 창조자일진 몰라도 내가 당신의 주인이 되겠다'하며 빅터를 번번이 고통에 빠뜨린다.


자신의 원죄와 같은 피조물을 좇으며 피폐해지는 빅터. 그리고 비루하고 무력해진 창조자의 죽음을 앞둔 크리쳐. 동이 곧 터올 무렵, 양측의 이야기가 끝난다. 크리쳐의 이야기를 들은 빅터는 사과하며 용서를 구한다.



"내 아들아. 죽음이 없다면 살아가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스스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여라. 그리고 살아라. 이제 우리도 인간이 되는 걸까? 내 이름을 다시 불러주겠니? 한때 너의 세상이었던 이름을."


"모든 건 그저 한 순간이야. 희망도 분노도 무의미하지. 날 데려온 밀물이 나만 남겨두고 썰물이 되어 떠나네. 빅터, 용서한다."


빅터는 숨을 거두고 동이 튼다. 크리쳐는 배를 떠나고 선장은 무의미한 목표를 제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항로로 튼다. 그리고 크리쳐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비로소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한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부모나 신을 원망하지 않고, 나의 불완전함과 삶을 받아들이고 살 수 있을까. 이름도 없이 삶에 던져진 크리쳐를 보고는 김종연 시인의 시<영원향방감각> 속 기계와 너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향방감각

네가 살아 있었을 때가 그리워. 지금 이 기계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해 봐. 다시 한번.

제발 다시 한번만.

유리병에 풍경을 담아와 쓰다듬는다. 유리병은 새근새근 숨 쉬는 소리로 가득하다.

그가 꾸는 꿈은 일정하고 반복된다.
자고 일어나면 울거나 웃는다. 그것을 선택이라도 한듯이.

그것이 마음에 들면 마음은 그것의 포장지가 된다.
언제 뜯어질지 몰라 불안해한다. 그것이 이제 마음의 남은 일이 된다.

기억이 재생될 때 모든 입체는 단면의 무한한 연속으로 보인다.

한 장 씩 떼어다 방에 붙이고 방을 돌리면
같은 장면이 반복되어 영상을 만든다.

앞과 뒤가 맞지 않아도 사람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멀미가 난다면 가라앉기를 멈춘 것이다. 사람의 밀도가 표면과 같아진 것이다.

유리병은 깨지기 쉬워서
많은 유리병을 탄생시킨다.

살아가는 것이 살아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때.
어딘가에는 그와 같은 사람이 다 자란 채로 태어나 살아간다.

죽음의 대체재가 삶이었다고
수요가 있는 공급이었다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한다. 코를 지나 입술. 입술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말이 가득하지.

그중 하나만 말해 줄까.

내가 너를 믿는 신이야. 너를 만들 때 나는 가장 기뻤단다. 너는 모를 거야. 나의 기쁨이 나를

어떻게 지옥에 빠뜨리게 되었는지를.

패턴 없는 암호를 해독하려고 온 세상의 패턴을 지우다가
문득 세상의 전원을 모두 꺼 버렸을 때.

그때 사랑은 일어나 한 사람의 어깨를 짚고 사람은 평생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너는 말을 너무 돌려서 하는구나.
원형 테이블 위에서 단 한 사람을 지목하려 돌아가는 유리병.

너는 개봉되었다.
유통기한을 모르는 채로.

유리병 안에 돌과 모래를 담아 오듯이 단단한 뼈를 연약한 살이 감싸고

너를 대체하려고 기다리는 수많은 대체재들.
네가 망가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찢어져 산산조각이나 흩뿌려질때

그것이 너의 쓸모.

마음이 지키고 있던 마음이 말한다.
그동안 나를 왜 가둬 두었어?

이 기계는 고장 난 것이 아니다.

기억을 말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사람의 이야기였다고.

이 다음부터는

내 이야기라고.


'죽음의 대체재가 삶이었다고(…) 내가 너를 믿는 신이야. 너를 만들 때 나는 가장 기뻤단다. 너는 모를 거야. 나의 기쁨이 나를/어떻게 지옥에 빠뜨리게 되었는지를.'

시 속에서 창조자의 원망을 받는 기계처럼, 크리쳐도 원치 않게 삶을 얻고 창조주의 원망을 받는다. 지능도 없고, 그저 멍청하다고. 빅터가 버리고 간 이후의 크리쳐는 '단면의 무한한 연속'처럼 기억과 세상을 맞추어 나간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인간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와 같이 살고자 한다.


결국 '이 기계는 고장 난 것이 아니다.'하는 부분처럼 크리쳐는 실패작이나 없애버려야 할 괴물이 아니었다. 불완전한 자신의 창조자 빅터를 인정하고 용서한 크리쳐는 태양을 보며 선언하듯 눈물을 흘린다.

'이 다음부터는/내 이야기라고.'




빅터가 환상 속에서 본 어둠의 천사나 괴물이라 불리는 크리쳐는 실상 통상적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을 뿐 그 존재 자체는 본디 선도 악도 아니다. 인간이 붙인 명명. 이름이 영향을 주는 것은 사회적 인식이지, 존재의 본질은 아니다.


고로 크리쳐가 어떻게 불렸든, 중요한 건 사람들의 명명이 아니다. 괴물이란 명칭에서 아들이란 호칭을 들은 그는 빅터를 용서했다. 그리고서 그는 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고통과 욕망으로 창조된 크리쳐. 그리고 수천 년째 이어져 온 재생산. 신과 피조물, 아버지와 아들의 형식을 빌렸으나 인간이 만든 무엇을 어떻게 명명하든 그 존재는 존재 자체로의 본질을 지녔다. 유전과 여러 가지 것들이 계승되나 본질 위에 덧칠하는 것뿐이다.


이름으로 다 알 수 없는 본질. 본질과 이름 사이의 나.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할까. 지나간 것들이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영향을 미치지만, 얽매일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다. 불가지론은 명명에서 끝날 뿐, 본질까지 닿지 않는다.


그래서 명명과 본질에 대한 존재론 앞에서의 답은 이렇게 귀결된다.

"이 다음부터는 내 이야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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