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2025)
세상이 무대이며 인생은 연극이고 모든 이는 배우라는 익숙한 말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 무대가 곧 세상이고, 극이 인생이며, 조명 아래에서만 비로소 자신이 된다. 예술이 이미 자신의 인생인 사람에게 무대 위에서 사는 것과 무대 밖에서 사는 것, 어느 쪽이 진짜 삶일까?
흔히들 하는 말이 있다. 예술은 인생보다 길다. 이상일 감독의 <국보>는 정말로 인생에 예술밖에 남지 않는, 예술 외에는 존재할 수가 없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의 예술은 아름답다. 그는 인생 전부를 그 아름다움에 헌신한다.
1964년 나가사키. 야쿠자 '타치바나'가 연 신년회에 유명한 가부키 배우, '하나이 한지로'가 참석한다. 연회에서 아리따운 소년이자 타치바나의 아들 '키쿠오'의 작은 연극이 펼쳐지고, 한지로는 그를 인상 깊게 본다. 그러나 갑작스런 침입으로 키쿠오는 아버지 타치바나가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후,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다 실패하고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죽는다. 갑작스럽게 고아가 된 키쿠오는 가부키 명문가의 명배우 한지로의 문하에 들어간다. 혈통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가부키 세계에서 외부인인 그는 '하나이 토이치로'라는 무대 명을 받고, 한지로의 친아들이자 후계자인 '슌스케'와 함께 가부키 수련을 시작한다.
함께 인간 국보 '만기쿠'의 <백로 아가씨> 공연을 관람하는 날. 만기쿠는 키쿠오를 보고, 아름다운 얼굴에 스스로 먹혀버릴 수가 있다고 경고한다. 그 순간도 잠시, 키쿠오는 무대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된다.
키쿠오와 슌스케는 형제처럼 유대를 쌓아가지만, 천부적 재능을 지닌 키쿠오와 혈통은 있으나 재능이 부족한 슌스케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 둘의 욕망은 단 하나, 진짜 배우가 되는 것.
둘이 함께 공연하는 무대에서 한지로는 말한다.
"슌스케, 네 몸의 피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이 말은 오래도록 키쿠오에게 남는다. 후일에 슌스케에게 네 피를 마시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어느 날 사고를 당한 한지로의 대역으로 슌스케가 아닌 키쿠오가 지목되고, 이에 슌스케는 가부키 세계와 집을 떠난다. 그렇게 8년이 흘러 돌아오지 않는 슌스케 대신 가부키 3대의 계승은 키쿠오가 이어받게 된다.
한지로의 임종이 다가오고 슌스케가 돌아온다. 키쿠오가 사랑했던 '하루에'와 아이와 함께. 계승이 무슨 소용인가. 재능보다 피가 가장 중요한 폐쇄적인 가부키 세계에, 이름을 이어받았을지라도 키쿠오는 주요 배역을 따내지 못한다.
돌아온 슌스케에게 다시금 가부키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는 키쿠오. 그때 만기쿠는 들으란 듯 말한다.
"가부키. 원망하고 싫어서 미워 죽겠지? 그래도 괜찮아. 계속 해야 해. 그게 배우야."
배역을 위해서였을까. 키쿠오는 다른 가부키 집안의 딸에게 접근하고 결국 가부키 계를 떠나게 된다.
허름한 행사를 다니던 키쿠오를 그녀마저 떠나고, 아흔이 넘은 만기쿠가 그를 부른다. 그는 다시 슌스케와 무대에 서게 된다. 그러나 슌스케는 당뇨합병증으로 다리를 절단하고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죽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결혼도 가정도 제대로 꾸리지 못했지만, 재능만은 출중히 남은 키쿠오. 그는 인간 국보로 선정된다. 국보 선정을 인터뷰하는 자리, 그의 사생아였던 딸이 사진기자가 되어 그에게 묻는다. '가부키 최고 배우가 된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악마와의 거래가 잘 성사된 것 같다고.
그런 키쿠오는 하나의 풍경을 찾아다닌다. 만기쿠가 보여주었던 그 <백로 아가씨>를 무대에 올리게 되고, 박수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뜬 그는 보게 된다. 자신을 홀렸으며 그토록 찾아다니던 그 풍경을. 오직 무대에서만 볼 수 있고 무대 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풍경. 키쿠오의 입에서는 한 마디가 흘러나온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가부키에 인생을 바친 키쿠오의 50년이 담긴 영화. 러닝타임 내내 느껴지던 것은 어떤 성취감이 아닌, 자신의 인생보다 더 큰 것에 헌신할 수밖에 없었던 쓸쓸하고 찬란한 아름다움이었다.
무대 위가 아닌 그의 삶은 상처와 좌절, 실패, 외로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조명이 켜지고 막이 오른 순간 그의 삶은 그것들과 완전히 멀어진다. 마치 강정 시인의 <배우는 퇴장할 줄 모르고>처럼.
배우는 퇴장할 줄 모르고
이제, 세상은 충분히 낯설어져 있다
배우인 나는 한번도 죽어보지 않았기에 무대가 곧 나의 무덤임을 안다 나는 나를 펼쳐 보고 모방할 뿐이다 조명이 입을 다문 침묵과 어둠의 한 귀퉁이, 나의 연기는 웅크림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하얗고 단단한 이빨로 팝콘을 씹으며 객석에서 엉덩이를 내려놓을 뿐이다 조명이 입을 열어 싯누런 무대 위에 나를 뱉어 낸다
산다는 건 죽음의 결핍이야
죽음이 무언데?
나의 어둠을 되찾는 것
조명이 세상을 읽어 내리기 전의
밝음보다 짙은 세상의 중심, 혹은 전부
객석에는 작고 동그란 어둠들이 심어져 있다 그들은 조명 아래 나를 보지만 나는 어둠 속의 그들을 본다 밝음은 나의 탓이 아니다 조명이 들어오면 나는 항상 많은 걸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하지 않겠다 어떤 방향을 주시하도록 유도하지도 않겠다 어둠이 곧 모든 방향이므로 나는 나를 모방한다 그러나 하지 않겠다 나의 행위가 곧 나의 기록이므로 어둠 속에 불을 지른다는 걸 상상하지도 않겠다 불은 쉬이 꺼지고 어둠보다 짙은 잔해가 거기에는 남는다
막이 내리면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은
빈 팝콘 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고
몇 번씩, 낯설어진 세상을 향해
부신 눈을 닦을 것이다
"배우인 나는 한번도 죽어보지 않았기에 무대가 곧 나의 무덤임을 안다."라는 존재론적 역설처럼, 키쿠오가 느끼는 삶은 무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대 밖의 삶은 그에게 있어 죽음과도 같았을까. "조명이 입을 열어 싯누런 무대 위에" 그를 뱉어낼 때만, 그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듯 보였다.
"조명이 세상을 읽어 내리기 전의 / 밝음보다 짙은 세상의 중심, 혹은 전부"는 키쿠오가 찾아다녔던 그 풍경이 아닐까. 오로지 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그것. 객석의 불이 켜지기 전, 빛 아래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이 그에겐 전부였다.
막이 내리면 사람들은 극장을 떠나겠지만, 키쿠오는 퇴장할 수 없다. 그저 낯선 세상으로, 낯선 현실만이 있을 뿐. 그의 인생은 여전히 무대의 위에 있다. 그의 예술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현실의 인생 밖, 무대 위에서만 온전할 수 있다. 키쿠오는 무대를 떠날 수 없는 배우가 아니라,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다.
<국보> 속 키쿠오는 진정 <배우는 퇴장할 줄 모르고>의 배우가 아닐까. 자신의 인생보다 더 큰 것. 그것에 인생을 모조리 쏟고 그것만이 남을 수 밖에 없는 사람. 그럼에도 그것 외의 다른 방법은 찾을 수 없는 사람. 왜냐하면 그는 그 안에서만 살아 있으니까.
조명 아래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진짜 삶이란 예술 속일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이 죽어서도 예술만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괜찮을 것이다. 헌신에서 비로소 풀려나 자유로울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술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다 해도 삶의 가치를 능가할 수는 없다. 예술이 삶 없이 존재할 수 없기에, 예술은 삶에 귀속된다. 그럼에도 예술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그 뛰어넘음에 매료되든 속박되든 그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 예술과 그런 사람들에게 매혹된다. 이런 매혹이 지속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 매혹이 예술과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갈 것이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