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티넨탈 '25(2025)
가끔은 개인의 노력이 전부 부질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사소한 것들뿐이란 사실이 사방에서 다가온다. 가령 환경을 위해 매일 텀블러를 들고 다녀도, 백만장자의 개인 전용기 왕복 한 번으로 일어나는 공해를 상쇄시키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개인이 선의를 가지지 않고 살아야 할까. 그럼, 이 무용한 무게는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 것일까. 딱 떨어지는 결론은 결코 낼 수 없으리라. 점점 세분화되는 현대 사회에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다 다르기에 답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이런 개인의 딜레마를 라두 주데 감독의 <콘티넨탈 '25>는 투박하고 관조적으로 담아낸다.
인적 없이 이질적인 플라스틱 공룡모형들이 듬성듬성 있는 숲속.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남루한 남자가 누가 봐도 쓰레기인 것을 주우며 배회한다. 도시로 나온 그는 사람들에게 돈과 일자리를 구걸한다. 그의 이름은 '이온', 사람들도 피해 가는 노숙자다. 그런 그는 어떤 건물의 보일러실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살고 있다.
그러나 건물은 토지를 소유한 기업이 호텔을 짓기로 해 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의 퇴거는 이미 몇 달이나 미뤄진 상황. 그의 퇴거를 위해, 법 집행관 '오르솔리아'는 헌병들과 함께 도착한다. 퇴거를 위한 짐을 쌀 시간을 주기 위해, 그녀와 헌병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온은 자살한다.
돌아와 이온의 시체를 목격한 오르솔리아에게는 커다란 죄책감과 트라우마가 시작된다. 법적으로는 아무 책임이 없지만, 그녀는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가족들과 휴가도 떠나지 않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후원과 기부도 하고 친구를 만나 하소연도 하고, 엄마를 찾아가고, 법대생에서 이제는 배달 뛰는 제자와의 원나잇, 기도, 성직자의 도움까지 받는다. 이 장광한 롱테이크 신들 속에서 그녀는 결코 자신의 죄책감을 덜지 못한다.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 더욱 민족 갈등과, 경제적 불평등, 전체주의와 자본주의의 폐해만 드러날 뿐이다.
영화 중간중간 도시의 풍경이 삽입된다. 관조하듯한 프레임은 어떤 이의 죽음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부조리, 그리고 오르솔리아에게 일어난 내면의 괴로움과 현실이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평온하고도 냉혹한 현실은 이러한 정적인 관조에서 더욱 부각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결국 영화는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은 채, 그저 인생이 늘 그렇듯 쌓인 것은 쌓인대로 흘러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 채로 암전된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기분이라도 속죄의 느낌을 내고 싶은 현대인.
체제 속에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도 끝없이 양심이 찌른다고 토로해야겠는 이들. 그런 이들에게 고해성사나 참회란 최민우 시인의 <스테인리스 비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테인리스 비누
스테인리스 비누를 쥐고 물과 함께 씻으면
손의 악취가 사라집니다
그것이 정말 냄새를 없애 주는지 알 수 없지만
보고만 있어도 멀끔해진 기분이다
스테인리스 비누는 아무리 써도 닳지 않았다
색과 모양을 유지하고도 새롭게 씻어 낸다니
나는 마치 세례처럼 느껴진다
세례를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로 나누는
암묵적인 경계의 시선처럼
왠지 악당이 된 것 같은 기분
한 번도 세례받지 않은 것처럼 비누를 잡았다
더러운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이 쓴다
무색무취의 일상적인 믿음
스테인리스 비누로 손 씻는다고 손맛이 좋아지진 않는다
스테인리스 비누는 비로소 물로써 거듭난다
사람보다 쓸모 있어 보인다
윤기 나는 불쾌함
오묘한 광택의 장식품인데
나는 손만 씻고도 죄가 씻겨 내려갔다고 생각한다
기분만 그렇다 기분만
유사 과학이 판치는 세상, 이 시의 '스테인리스 비누' 또한 그런 물건이다. 이것이 손의 더러운 세균을 씻겨준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사용자들은 이것으로 손을 씻고 깨끗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것이 현대인의 죄책감 덜기와 닮지 않았는가?
닳지도 않고 손도 깨끗해지지 않은 채 죄만 씻겼다는, 그것도 기분만 그렇다는 구절은 극 중 오르솔리아를 포함해 많은 현대인의 마음을 지칭한다. 외면하지 못하고 무력하지만 어떻게든 씻어보려는 노력. 후원도 하고 기도도 해보는. 이것은 정말로 기분만, 말끔한 기분만 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무용하겠는가. 적어도 그런 마음의 힘이 사람에게 있는 한 무용하기만 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희망도 환상도 주지 않는다. 단지 보여준다.
이것을 보는 관객, 당신들도 그와 같지 않으냐고. 질문을 던지고 끝난다.
일상과 직업의 추한 면, 체제의 부조리, 역사 배경 위의 개인, 그리고 무력함. 그것을 당신도 잘 알지 않느냐고. 이런 모순과 자기기만에서 하루하루 살아가지 않느냐고.
그럼에도 이렇게 질문으로 끝나는 영화가 무의미하냐 한다면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영화 결말은 영화가 끝나고서 시작된다. 그것도 현재진행형으로.
암전 후, 관객은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없다며 지나치는 것과 현실을 응시하는 시각을 조정하는 것.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본 관객은 앞으로 무엇을 볼 것인가. 노숙자가 자살한 땅 위에 들어설 부티크 호텔 '콘티넨탈'25'인가, 아니면 그 아래 윤리의 부질 없음과 체제의 한계성인가. 과연 응시를 멈출 것인가? 결론은 관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