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을 든 소녀(2024)
어디든 도망칠 수 없는 전쟁터라는 감각.
세상도 전쟁이지만, 자기 몸 또한 전쟁일 때. 그럴 때는 전쟁으로부터 도망칠 곳이 없다. 인간 생명의 증거인 몸이 곧 도망칠 수 없는 족쇄가 되는 시간이다. 육체를 빼놓고 생명을 논할 수 없다. 그렇기에 몸을 찌르는 일은 곧 삶을 찌르는 일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한 영화 <바늘을 든 소녀>는 그 실화 사건 자체가 아닌, 그 곁에 있었던 여성에게 주목한다. 약자가 자신을 바늘로 찌를 수밖에 없는 곤경으로 몰아가는 사회. 자신을 찌르는 선택은 과연 오롯한 자신의 선택인가, 세상의 강요인가.
1차 세계대전 끝의 코펜하겐. 재봉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주인공 '카롤리네'. 집세가 밀린 끝에 그녀가 집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떠밀리듯 옮겨온 집은 물이 새고 수도와 전기 시설마저 열악하다.
먹고사는 일은 빠듯하고, 참전했던 남편의 생사도 알 수 없고, 공장에선 공장장의 추파가 이어진다. 돌아온 남편은 흉측하게 얼굴이 훼손되어 서커스단에서 구경거리로만 일할 수 있을 정도고, 이 와중에 공장장의 아이를 임신한다. 카롤리네는 그와의 결혼을 꿈꾸지만, 매정히 거절당하고 일자리마저 잃게 된다.
이미 상당 부분 찢긴 그녀의 삶. 그녀는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원치도 않는다. 그녀는 대중목욕탕에서 거대한 바늘로 스스로 낙태를 시도한다. 자신을 찌르는 커다란 고통 속 비명을 막으려 욕조에 잠수한 그녀를 누군가 끌어내 지혈하고 돌봐준다.
어딘가 든든해 보이고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중년 여성, '다그마르'. 그녀는 아이를 낳으면 좋은 집으로 입양시켜주겠으니, 자신을 찾아오라 제안한다. 몇 달 후, 카롤리네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다그마르를 찾아간다. 자신을 알아본 다그마르는 말한다. "아, 그때 너구나. 목욕탕에서. 바늘을 든 소녀."
갈 곳도 일할 곳도 없는 카롤리네는 자신을 조수로 써달라 한다. 그리하여 다그마르와 그녀의 딸 '에레나'와 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 관계도 잠시.
카롤리네는 다그마르를 미행하고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된다. 영아들은 어딘가 입양되는 것이 아닌 다그마르의 손에 죽어 유기된다는 것을. 카롤리네는 이 사실을 알고 앓아눕게 된다.
그녀를 지극히 간호하는 다그마르의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자신에 대한 동일 시였는지, 혹은 카롤리네에 대한 다른 사랑이었는지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곧 영아 살해 의혹으로 찾아온 경찰들이 오기 전, 카롤리네는 창밖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다.
원치 않았던 아이, 그러나 열 달간 뱃속에서 호르몬으로 유대감이 형성된 관계. 여성의 낙태도 불법이고, 원치 않는 임신이어도 낳을 수밖에 없던 시대상. 다그마르는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누가 좋은 가정에 입양됐다는 사실 따위를 실제로 믿느냐며, 그저 죄책감을 덜어주니 좋았을 거라 외친다.
이는 실제 사건이 기반이다. 1913년부터 1920년. 최대 25명의 영아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덴마크의 다그마르 오베르뷔(Dagmar Overbye)의 사건.
결국 다그마르는 사라지고, 결국 보육원으로 보내진 에레나. 그리고 떨어져도 살아남아 서커스의 남편에게로 돌아가 삶을 택한 카롤리네. 카롤리네는 보육원에 가서 에레나를 입양한다.
이렇듯 훼손된 삶의 가능성을 끌어안는 영화는 마치 유선혜 시인의 <너는 대숲에 왔다>와 같은 결을 가졌다.
찢어진 삶을 바늘로 찔러 죽일 수 없다면, 어떻게든 그 바늘로 기워서 살아가야 하는 법이니까.
너는 대숲에 왔다
뵈지도 않는 입김의 가는 실마리
너는 죽으러 대숲에 왔다. 아직 입김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계절. 그런 계절에도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은 분명히 있었고, 삶에서 흘러나오는 오물들이 있었고. 너는 그 모든 것을 틀어막고 싶었다. 너는 머리에 비닐봉지를 두르고 사라지는 산소를 들이마시려 한다. 숨이 가빠진다. 희박해진다. 희뿌연 비닐이 너의 일그러진 표정으로 달라붙는다.
새파란 하늘 끝에 오름과 같이
대나무의 끝이 하늘을 가린다. 반투명의 플라스틱 봉지 너머로 드문드문 보이는 하늘. 위를 향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올라가고 있다. 줄기의 끝에서 분열을 계속하며 쌓여 올라가는 것들. 조여오는 기분, 뿌옇게 변하는 시야. 대나무는 원래 나무가 아니다. 너는 풀로 태어난 것을 나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는데, 그 무엇에도 잘못된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는데.
대숲에 숨은 마음 기어 찾으려
너는 대숲에 왔다. 잃어버린 마음 때문에 왔다. 위로는 자라도 옆으로는 자라지 않아서 자꾸만 가늘어지던, 그러나 절대 끊어지지는 않던, 마음, 세월이 지나도 남지 않는 나이테에 허망해지던, 여전히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자라났지만, 켜켜이 쌓여갔지만, 영원히 속은 텅 빈,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그런 마음 때문에, 너는 여기까지 왔다. 기어서 왔다. 팔을 휘저으면 풀잎에 손이 베이고,
삶은 오로지 바늘 끝같이
너는 뭉툭한 것들을 모두 잘라 창으로 만들어야 했던 사람. 마음을 갈아 날카롭게 만들어야 했던 사람. 너는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무찌를 수 없는 것들은 분명히 있었고. 마모되어 사라져가던 마음 찾아 너는 대숲에 왔다. 그곳에는 오로지 텅 빈 바람 소리. 너의 손이 벌벌 떨며 비닐을 더듬는다. 삶이 너를 찌른다. 살라고, 살라고. 뭉툭한 손끝으로 풀기 어렵게 묶은 매듭을 찾는다. 너는 아직도 대숲에 있다.
이 시는 마치 카롤리네를 '너'로 칭하는 듯하다. 바늘로 자신을 찌르려던 카롤리네, 위험하게 스스로 낙태를 하려 하다 죽을 수도 있었을 그녀.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결국 다른 바늘을 만난다. 그 바늘은 그녀를 찌른다. 살라고, 뭉툭하게 무뎌져 가는 삶을 벼려서 살라고.
다그마르는 분명한 범죄자이며 실제 있던 사건은 참혹하지만, 그런 일 곁에서도 살아남은 카롤리네 같은 사람이 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말이다. 죽을 만큼 처참해도, 그럼에도, 살기 위해, 내일을 위해. 다그마르의 딸을 품은 모습은 뭉툭한 손끝으로 자신을 찌르던 바늘을 들어 삶을 기워가는 모습이 아닐까. '너는 아직도 대숲에 있다'는 시구처럼 바늘을 든 그의 삶은, 그 삶 가운데 있다.
바늘의 끝은 무언갈 뚫고 통과하기 위해 설계됐다. 천이든 살이든, 뾰족한 바늘의 끝은 찌른다. 날카로운 바늘은 상처의 도구이자, 회복의 도구다. 얇고 뾰족한 만큼 섬세하게, 찢어진 천과 몸의 상처를 꿰매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늘을 든 소녀>라는 제목은 중의적으로 다가온다. 카롤리네는 바늘로 자신을 찔렀으나, 결국 그 바늘로 전쟁 속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기워 인생을 끌어안았다. 삶을 찌르는 바늘은 자신을 해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을 꿰맬 수도 있으니.
어딘가가 망가져 복구될 수 없다는 느낌이 들 때, 두루뭉술한 위안의 말이 아니라 나아지기 위해 잠깐 아파야 할 때.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몸마저도 안식처가 될 수 없는 시간을 지나는 모두에게. 부디 우리가 집어 든 바늘이 인생을 깁는 일에 사용되기를. 그리하여 바늘의 끝같이 더욱 첨예한 눈으로 삶을 살 수 있기를. 카롤리네가 에레나를 끌어안았듯, 삶을 끌어안을 수 있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