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의 일생(2024)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와도 같다는 말을 자주 접한다. 인본주의적 관점과 인물을 탐구하는 분야에서 이 말은 한 사람의 품고 있는 시간과 수많은 가능성에 경이를 느끼는 이들이 남긴 말이다. 한 사람은 알게 될수록 느낀다. 사람은 각 하나의 우주이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그에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면이 있다. 사람은 입체적이고 다면적이다. 여기에 그의 기억과 상상, 가능성과 과거, 감정을 더하면 어떠한가. 그것은 무한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한 우주의 종말이지 않을까.
<척의 일생>은 이런 관점을 고스란히 담아 전하는 영화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난 이상 죽는다. 고로 모든 우주는 소멸한다. 하지만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멸을 기다릴 가치가 있는 아름다움이지 않은가. <척의 일생>은 이 모순으로 우리를 미소 짓게 한다.
정전은 일상에 인터넷도 먹통이고, 싱크홀은 이미 동네의 일이다. 전세계 재난에 대한 뉴스는 끊이질 않으며 사람들은 다가오는 종말을 어찌할 바 몰라 두 손 놓고 발만 동동 구른다. 이렇게 세상이 끝나는 것일까. 그런데 이 와중 도시 곳처에는 수상한 광고판이 붙는다.
'39 GREAT YEARS! THANKS CHUCK!'
'멋진 39년이었어요! 고마웠어요, 척!'
세상이 끝나가고 있는데, 도처에 붙은 이 뜬금없는 광고란 무엇인가. 빌보드마다, 창문마다, 하늘에 비행기가 그리는 글씨에도 붙은 '고마웠어요, 척'. 학교 선생님인 '마티'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척 크란츠'라는 사람을 아느냐며 묻지만, 그 누구도 척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는 자신의 간호사이자 자신의 전처인 '펠리샤'에게 가기로 한다.
마티는 우주가 1년이라면 5월에 은하수가 생겼고, 인간은 12월 31일 오후 10시 반쯤 등장했다는 우주 달력 이야기를 펠리샤에게 해준다. "세상이 하수구로 떠내려가는데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짜증 난다는 말밖에 없다니." 펠리샤와 마티는 허탄해하며 웃는다.
그리고 아마도 세계의 마지막 날인 밤, 둘은 하늘의 은하수와 별자리를 보던 중 별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다. 하나, 둘, 그리고 우수수. 모든 별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병실 안의 눈을 감은 남자.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말한다.
"겨우 39년… 근사했던 39년이었어. 고마웠어요, 척"
세상이 암전된다.
드럼으로 버스킹 공연을 하고 있는 '테일러'. 아직 사람들은 그녀의 공연에 주목하지 않고, 팁 모자는 자신이 넣어둔 지폐 두 개가 전부이다. 주말을 앞둔 설렘이 있는 목요일의 도시. 이때, 한 비즈니스맨이 그 앞을 지나간다.
'찰스 크란츠'. 애칭은 '척'. 회계사의 갑옷, 수트를 입고 막 '21세기 금융' 컨퍼런스를 마치고 나온 참이다. 그는 회계사들과 나머지 하루를 보내느니 다른 일로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며 길을 걸어간다. 울리는 드럼.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척은 그 자리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곳을 지나치던 다른 한 사람, '재니스'. 그녀는 16개월 만난 남자 친구에게 방금 문자로 차였다. 그렇게 사랑하지도 않았으나 화가 난 그녀는 척의 춤을 홀린 듯 바라보고 같이 그루브를 탄다.
"나오시죠, 자매여. 같이 춤춰요."
드럼과 춤. 신나는 즉흥 공연 후, 그들은 여전히 박수칠 때 자리를 뜬다. 척과 재니스는 해지는 길을 걸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짧게 나눈다. 재니스는 "세상이 하수구로 떠내려가는 기분인데, 할 수 있는 말이 짜증 난다는 것밖에 없다는 게 싫어요."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하고, 척은 그녀에게 위로를 건넨다.
돌아가는 길. 척은 낮에 춤추었던 길을 지나치며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왜 멈춰서 들었는가, 그리고 왜 춤을 시작했을까. 하지만 답은 굳이 찾지 않는다. 답을 안다고 좋은 기억이 더 좋게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이날은 사실 척이 죽기 6개월 전이었다. 왜 춤을 췄을까? 앞으로 몇 달 동안 건강이 악화하면서, 그는 깨닫는다. 세상이 바로 그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고. 그 춤이 모든 것이었다고.
여동생의 탄생을 기다리던 7살의 척. 그러나 빙판길에 차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슬픔에 잠긴 조부모님 댁에서 지낸다. 할아버지는 술과 숫자로 슬픔을 삭이고, 할머니는 그가 10살쯤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할 때 할머니는 로큰롤을 들었다. 그리고 춤을 추었다.
"이리와요, 작은 형제여. 같이 춤춰요."
그는 조부모님 댁에서 모든 걸 허락받았지만, 단 한 곳. 다락방만큼은 들어갈 수 없었다. 어느 날, 티비에서 칼 세이건의 우주 역사가 150억 년을 1년으로 비유하는 우주 달력 방송이 흘러나오고, 술에 취한 할아버지가 다락방에 관해 이야기를 조금 털어놓는다. 그곳에서 그는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의 유령"을 봤다고, 그러니 들어가면 안 된다고. 기다리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학교에선 아이들을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교사 '리처즈'의 여름방학 전 마지막 수업이 진행 중이다. 그녀는 월트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를 읽어주고 척 외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수업이 끝나고, 척은 선생님에게 묻는다. "근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수많은 것을 품고 있다'?"
리처즈는 척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쥔다.
"내 손 사이에 뭐가 있지?"
"제 뇌요?"
"아니, 그거 말고."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사람들?"
"그뿐이게? 네가 보는 모든 것, 네가 아는 모든 것. 바로 세상이야, 척."
"네가 만난 모두로 그 세상을 채워. 네가 아는 모두로. 네가 상상한 모두로. 그곳은 우주가 될 거야. 그러니 지금 내 손 사이에 우주가 있는 거지. 넌 수많은 것을 품고 있어. You contain multitudes."
척은 이후 댄스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다. 댄서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회계사인 할아버지가 숙제를 봐주며 수학으로 나아가라는 조언을 해준다.
"수학이 지루하니? 지구의 모든 직업과 삶의 모든 면에 수학이 쓰인단다. 지구의 나이, 별이 왜 타오르는지, 원자가 왜 쪼개지는지. 전부 다 수학이야. 그뿐만이 아니라 거기엔 예술이 있어. 내가 하는 일. 이 모든 파일, 숫자. 이게 다 사람들의 인생이야. 세상은 회계사를 필요로 한단다."
이후 같은 댄스 동아리의 선배에게 초대받아 학교 파티에 가게 된 척. 그는 춤을 춰야 할지 말지 망설이다, 멋지게 춤을 춰낸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박수 칠 때 공연을 마치고 바깥으로 뛰어나간다. 운동장,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로. 아내에게 이것을 회고하며 담담히 말한다.
"별들은 숫자겠지만 별들도 춤을 췄어. 그때 생각했어. 우주는 거대하고 수많은 것을 품고 있지만 나 또한 품고 있으며…. 그 순간, 나는 경이로운 존재라고. 경이로울 자격이 있다고."
5년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사가 할아버지가 이미 다 자기 죽음을 준비해 뒀다는 얘길 해준다. 미리 알고 있던 사람처럼 다 준비했다고. 척은 금지됐던 다락방의 문을 열어본다. 햇빛이 들어오는 다락방.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본다. 옆에서 삑삑 소리를 내는 심전도기가 연결된 남자, 바로 자신. 이때가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깨닫는다. 할아버지가 본 것이 이런 것이었음을.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게 왜 제일 힘든 부분이라고 했던 것인지를. 과연 자신의 이런 모습이 몇 살쯤일까, 이 기다림은 얼마나 길까.
하지만 곧 척은 생각한다.
"없다고 여길 거야. 삶이 끝날 때까지 내 삶을 살 거야. 난 경이로워. 경이로울 자격이 있어. 난 수많은 것을 품고 있어."
한 사람이 죽으면 하나의 우주가 소멸한다. 하지만 그 소멸을 향해 끝까지 자신답게 사는 것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바로 '척의 일생'이 우리의 일생이 되는 부분이리라.
사탕이 녹는 동안
사탕이 녹는 동안, 한세상이 지나간다. 오래된 표지를 넘기면 시작되는 결말. 너는 그것을 예정된 끝이라고 말하고 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옮긴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거야. 어디서든, 어떻게든. 등 뒤에서 작게 속삭이는 사람들. 멀리 있는 사람들. 그것이 인생이라고 노래 부르는 사람들. 새롭지는 않았으나 아는 노래도 아니었다. 다만 열꽃을 꽃이라 믿던 날들을 돌이키며 각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뿐. 후회와 미련에 붉은 줄을 그어놓고 오늘도 어디선가 새는 울겠지. 내일도 어디선가 새는 새로 울 거야. 흔들리는 시선이 고요해질 때까지 우리는 몸을 낮추고 눈을 낮추고 아래로, 더 낮은 곳으로. 끝의 시작은 보는 것. 본 것을 읽는 것. 읽은 것을 잊는 것. 잊은 것을 다시 잊는 것. 이제 우리 앞에는 흰 종이가 놓여 있다. 검은 물이 흘러나오는. 천천히 낡아가는.
개미가 줄지어 간다 녹아버린 사탕을 끌고
마지막까지 마지막을 드러내지 않고 어떻게든 어디로든
김선재 시인의 시 <사탕이 녹는 동안>은 제목부터 우리의 인생이 찰나의 시간임을 암시한다. '사탕이 녹는 동안, 한세상이 지나간다'는 영화 속에 인용된 칼 세이건의 우주 달력 이야기처럼 사람의 삶이 얼마나 찰나인지 표현한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이것이 '예정된 끝'이겠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그럼에도 시작된다. 척이 자신의 죽음을 알고도 자신의 삶을 끝까지 살아냈듯이 말이다.
'후회와 미련에 붉은 줄을 그어놓고 오늘도 어디선가 새는 울겠지'도 그렇다. 사람은 살면서 많은 후회와 미련을 가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기에 '붉은 줄을 그어버리고' '사탕이 다 녹을 때까지' 자신의 삶을 자신답게 끝까지 사는 것이리라. 척이 자신의 죽는 모습을 보고도 경이로울 자격이 있다고 다짐했듯이.
<척의 일생>은 한 사람의 죽음을 다루면서 삶의 유한한 찬미를 부각한다. 척은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그가 품은 우주는 광대했고 풍요로웠다. 한 사람의 마음은 그 자신, 그가 아는 모든 사람, 본 모든 것, 가본 모든 곳, 상상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의 일생 이야기는 모두의 일생 이야기다.
아마도 척이 춤을 춘 이유는 그저 음악이 있고, 그가 충만히 살아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태어난 이상 모두 죽는다. 척처럼 자신의 죽는 모습을 봤든, 보지 않았든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는 그 사이, 각자의 우주를 갖는다는 것. We contain multitudes. 우리는 수많은 것을 품고 있다.
결국 우리가 죽듯, 우리가 품은 우주는 소멸할 것이고 종말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살아있고 충만하다. 고로 척처럼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네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리와요, 형제자매여. 같이 춤춰요."
우리가 춘 춤 후,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분명 이런 플랜카드가 거리마다 걸릴 것이다.
"그동안 고마웠어요!"라고.